24.02.09

 

여행의 끝은 항상 아쉽다. 환상과 작별하고 현실을 마주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기에. 2월 9일 아침이 이런 마음이었다. 분명 아침의 공기는 상쾌해서 폐까지 시원함이 전달되는 느낌이었지만, 머리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3일이 너무 즐거웠기에, 환상속에서 벗어나기 싫어서 한숨만 여러번 내쉬었다. 와이프한테 전화를 해서 "돌아가기 싫어~"라고 투정 부렸더니 "다음에 우리끼리 같이 오면 되자나~"라고 타일러 주는데 그새 이런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어졌다. 

 

한조몬역 근처에 있는 허름한 소바집에서 돈까스 카레와 소바로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70대 전후의 오너라고 생각되는 사장님과 비슷한 동년배 손님이 전부였다. 맛을 기대한 건 전혀 아니었지만 기본적인 응대나 그런 것들은 전혀 되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눈치를 봐야하는 느낌이었다. 나중에 구글 평점이랑 리뷰를 보니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기본적인 맛은 좋지만 접객 관점에서는 손님이 불편함을 많이 느끼는 곳이라는 평이 대부분. 

 

 

 

체크아웃을 한 뒤, 택시를 타고 도쿄역으로 이동했다. 원래 계획은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가기. 그런데 1300엔으로 공항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해서 버스를 선택했다. 더 이상 현금을 쓰기 싫어 스이카 충전을 했는데, 뭔가에 홀린것처럼 스이카로 탑승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불쑥 들어 현금을 내고 티켓을 샀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버스를 기다리는데 아뿔싸, 스이카로 버스를 탑승할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버렸다.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돌아갈 때가 되어서 마음이 풀린걸까, 이런 실수를 안하는데 말이다. 스이카에 충전한 금액은 다음 여행 때 쓰는 것으로 하고 티켓을 내고 빈자리에 앉았다. 1300엔이라는 저렴함은 좋지만 버스가 매우 컴팩트해서 신주쿠에서 타던 공항버스와는 차이가 있었다. 운영하는 회사의 차이겠지만 옆사람과 거의 붙어서 가야한다는게 은근히 불편했다. 

 

1시간 정도 지나,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익숙해질대로 낯설지 않은 이곳. 오랜만에 아시아나 항공을 타기에 이번에는 스카이팀 본진이 위치한 북쪽 윙이 아닌, 스타얼라이언스 본진이 모여있는 남쪽 윙을 이용했다. 확 트인 공간과 밝은 채광이 북쪽 윙과 비교될 정도이다. 아무래도 스타얼라이언스 회원 중 하나인 ANA 항공 영향이 큰 듯 싶다. 간단히 체크인을 마치고 (후지산이 보이는 좌석으로 이미 사전 배정을 해두었지), 지체할 것도 없이 패스트트랙을 통과했다. 항상 주장하는 것이지만 한국에도 노약자, 임신부 등 이외에도 특정 등급 이상 고객 또는 클래스 이상 탑승자에게도 패스트트랙을 제공해야 한다. 

 

 

 

CIQ를 마치고 ANA 항공 라운지로 향했다. 나리타 공항 1터미널에는 총 4개의 라운지가 있는데 북쪽 윙에 위치한 대한항공이 운영하는 스카이팀 라운지, 남쪽 윙에는 ANA 항공이 운영하는 ANA 항공 라운지, 그리고 이곳을 허브로 삼고 있는 유나이티드 항공이 운영하는 유나이티드 라운지가 있다. 유나이티드 라운지도 사용 가능하였지만, 몇몇 후기를 보니 ANA의 그것보다 별로라고. 오래전에 ANA 항공 라운지를 이용했을 때, 기대 이상으로 만족한 경험이 있어 오랜만에 ANA 항공 라운지를 이용하기로 했다.

 

스카이팀 라운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질적인, 양적인 면에서 마음에 들었다. 아무래도 스카이팀에 일본 국적 FSC가 없다보니 북쪽 윙의 일부 구역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반면, ANA 항공 라운지는 우선 공간적인 명에서 매우 넓어서 좋았다. 게다가 제공하는 음식도 수준급으로 서비스 되다보니 자연스레 아시아나 항공의 존재감을 깨닫게 된다. 빠르면 1-2년 이내에 아시아나 항공이 사라질 예정인데, 이렇게 된다면 스타얼라이언스의 기타 항공사를 이용하지 않는 한 나리타 공항에서 이러한 수준급 서비스를 경험하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원래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라운지를 즐기기 위해 생맥주를 비롯해서 각종 먹을 것을 바리바리 챙겼다. 창밖으로 보이는 비행기 이착륙을 바라보며 지난 3일간의 행복한 순간들을 추억하고 있는 순간, 옆에 앉아 있던 중국인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짐을 챙겨 일어나는게 시야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아들 같은 느낌이었다. 같이 여행을 왔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넘어가려 했는데 우연찮게 손목으로 시선이 향하는 순간, '우정 팔찌'를 차고 있는데 눈에 들어왔다. 분명 스위프티라는 확신이 생겨, 기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혹시 스위프티냐고 물어보았다. 그 사람들도 옆에 앉은 낯선 사람이 갑자기 질문을 하니 당황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그렇다고 답을 해주셨다.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어 그들이 가야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냈다. 나도 스위프티다, 2월 7일에 콘서트에 갔었다, 우정 팔찌보고 스위프티라 생각되어 반가워 말을 걸었다, 나도 우정 팔찌 주고 싶다고 말하며 우정 팔찌를 건냈다. 갑작스럽게 우정 팔찌를 주는 상황이 되니 상대방은 급 놀라면서도 웃으면서 받아줬다. 그리고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네들은 중국 베이징에서 왔다고 반갑다고 말을 해줬다. 5분도 채 안되는 순간이었지만, 여행의 마지막까지 스위프티로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어 좋은 기분이었다. 

 

 

 

 

탑승 시간이 가까워져 라운지와 작별의 인사를 고하고 게이트로 이동했다. 게이트 번호는 분명 두자리수인데, 새틀라이트 건물에 있다고 하길래, 무작정 아래로 계속 이동했다. 가까운 줄 알았는데 지하까지 계속 내려가더니 이번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무빙워크를 타고 이동했다. 탑승 마감 시간은 가까워져 가는데 지하 터널은 끝이 보이지 않아 초조해지다보니 나도 모르게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더 갔을까, 이제 터널은 끝이 보이니 살짝 한숨이 놓였다. 그래도 아직 게이트는 보이지 않으니 스퍼트를 올린다. 터널의 끝은 에스컬레이터였다. 정신 없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저 먼곳에 내가 가야할 게이트가 보였다. 분명 시간에 맞춰서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보딩 패스 확인을 하고 비즈니스 클래스로 입장하니 따뜻한 미소를 지은 승무원이 자리로 안내해줬다. 이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혹시나 비행기 못탈까봐 걱정했는데. 

 

 

 

 

 

활주로까지 이동한 비행기는 금새 이륙을 하였다. 후지산을 보고 싶어 (수없이 봤지만) 일부로 좌측 좌석을 선택하였건만, 구름이 가득껴서 이번 여행에서 후지산을 보는건 어렵다고 생각이 들었다. 분명 도쿄를 출발할 때는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이었건만, 나리타 도착하고 나서는 비와 구름으로 가득해져버린 회색빛 하늘에 야속함이 살짝 들기도 하였다. 그래도 나리타 공항만큼은 뚜렷하게 보여 좋았다. 그리고 도쿄 도심 상공을 지나면서 보이는 조그맣게 보여지는 건물들을 보며 3일간의 조각들이 마치 영화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별 인사를 고해야지. 안녕 도쿄. 다음에 또 올게. 

 

 

 

24.02.08 

 

 

창문으로 스며드는 햇빛에 눈이 떠졌다. 아직도 공연 휴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분명 어제 다녀왔는데, 맘껏 즐겼는데도, 행복했는데도,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갑작스럽게 오늘 공연을 가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공연 분위기에서 빠져나오기 싫어서 테일러의 음악을 들으면서 누워있었다. 오늘은 일정이 없어서 이런 여유를 부리는거다.

 

도쿄의 아침은, 항상 올 때마다 느끼지만, 청량함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리는 듯 싶다. 적절한 따뜻함과 쌀쌀함이 만들어낸 조화라고 해야하나. 발걸음이 가벼워져 어디든 달려갈 수 있을것만 같았다. 분명, 미세먼지가 없어서 그런거다. 아니면 도쿄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도쿄 바이브를 제대로 즐기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날의 아침은 YOASOBI '群靑'을 꼭 들어야만 했다.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어, 오모테산도역에서 시부야역 방향으로 하염없이 걸었다. 걸어가는 도중 'United Nations University'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원 때 UN 인턴을 마치고 UN뽕으로 가득 차 있었을 땐 UN 건물, 표식만 봐도 좋아했었다. 그때는 지인 찬스를 사용해서 건물 안으로 들어가 구경도 하였는데, 지금은 현실을 살아가는,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오래된 기억의 일부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디선가 'Note Coffee' 글을 보고 인상이 깊었던 나머지 도쿄에 간다면 꼭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오전에 일찍 오게 되었다. 카페 간판이나 표시가 없어서 여기가 카페 맞아?라고 생각할 정도로 어리둥절했는데, 문을 열고 두근두근하면서 내려간 카페는 슈퍼 멋진 공간이었다. 토요일 오전 11시라 사람이 많을까 우려스러웠는데, 나보다 일찍 온 손님 1명을 제외하고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의 시그니처 메뉴인 히말라야 커피와 초콜릿 케이크를 주문했다. 과하게 달지 않고 진해서 좋았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활기찬 시부야와는 전혀 반대의 느낌, 그래서 더욱 마음이 들었다. 이곳에 있었던 1시간 동안 단 한명의 사람도 오지 않아서, 먼저 와 있던 분과 이곳을 렌트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데이트 상대와 오게 되면 참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독만이 가득한 카페를 채우는 재즈 음악이 편안해서, 좋은 커피와 함께 음악을 즐기며 상대방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우아함이 여기를 더욱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는 듯 싶었다. 다음에 도쿄에 온다면, 이곳은 다시 꼭 와야지. 

 

 

 

 

카페를 뒤로하고 시부야의 레코판으로 향했다. 꼭 사고 싶었던 LP가 있어, 다시 한번 보고 구매 결정을 내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1999년 발매 싱글  'ウラBTTB'를 이틀전 왔을 때 발견했을땐 너무 좋았다. 절판이 되었고 LP라는 것 때문에 중고 시장에서 높은 가격대로 형성된 상태인데, 사카모토 류이치의 사망으로 인해 가치가 더욱 올라가 이때 안사면 나중에는 정녕 못살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발매 당시에 1,500엔이었던 (세금 제외) 가격이 지금은 12,800엔까지 되었으니 어머! 이건 꼭 사야해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몇번이나 집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마음에서는 지금 안사면 후회할거야라고 사라고 말하는데, 머리속으로는 이번달 카드값 생각해라고 말리니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다음에 왔을 때 'ウラBTTB'가 있을 거라는 장담을 못하기 때문에 더욱 더 망설였다. 테일러 스위프트 에라스 투어 티켓은 프리미엄이 붙었어도 망설임이 없었는데, 심지어 더 비쌌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구매를 포기하였다. 다음에 도쿄에 왔을 때 있기를 바라며. 정 안되면 메루카리라도 뒤져야지. 흑흑. 현생을 사는 인생이라 다음 기회를 꼭 잡아야지. 

 

 

 

레코판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와세다 대학으로 움직였다. 대학 탐방이라는 묘미도 있지만, 2021년 오픈한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에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커다란 팬은 아니지만, 한번 쯤 하루키 세계관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을거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모든 작품 이외에도 하루키가 즐겨 들었던 재즈 음악을 들을 수 있고, 하루키의 서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고, 하루키의 소설에서 즐겨마셨던 커피도 마실 수도 있는, 하루키의 세계관이 집대성되어 있는 공간이라하니 안가볼 수 없었다.

 

와세대 대학은 워낙 유명하니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일본 최초 사립 대학 중 하나이고 일본 뿐만 아니라 글로벌에서도 뛰어난 명성을 지녔으니 학교 분위기를 맘껏 느껴보고 싶었다. 평일 오후임에도 불구하고 캠퍼스 주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게이오 대학을 갔었을 때는 전혀 이렇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는 주말이었는데도. 학교 행사라도 있나 싶어, 후문 근처에서 대학 관계자분께 물어보니, 이번 주는 와세다 대학 부속 고등학교 입학 시험 기간이라고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에는 사전 허가를 받은 사람들 이외에는 (학교 관계자) 외부인 출입이 전면 통제 된다고 덧붙여서 말해주셨다. 순간, 머리를 몇대 맞은 느낌이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입학 시험 기간인줄 전혀 몰랐으니. 아쉬움이 매우 컸지만 다음에 오면 되자나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서관은 비롯 못갔지만, 후문 거리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하루키가 자주 다녔다는 재즈 킷사 'Jazz Nutty'에 왔다. 전혀 킷사처럼 보이지 않던 곳. 간소한 판자를 대놓은 벤치 시트가 시선을 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스터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안내해주셨다. 맥주를 마실까하다 다른 재즈 공연때 맥주로 할테니 커피로 결정하였다. 주문을 하면 주전부리로 킷사 이름과 어울리는 아몬드와 비슷한 견과류를 주셨다. 맛있었다. 

 

대학가 근처임에도 대학생보다는 중장년의 재즈 매니아 분들이 분위기를 즐기고 계셨다. 양쪽에 놓인 대형 스피커로 인해 들리는 재즈의 밀도가 공간을 가득채우는 깊어지는 느낌이었다. 분명, 마스터가 스피커를 세팅할 때부터 위치나 각도에 대해 많이 고민하시지 않았다라는 생각도 들었다. 더욱 놀라웠던 건, 출입문을 닫으면 밖으로 절대 음악 소리가 새어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섬세함 덕분이랄까, 영화 위플래쉬에서 셰이퍼 음악 스클의 빅밴드 공연을 1열에서 관람하는 듯 했다. 

 

박찬욱 감독의 중후한 느낌을 뽐내는 마스터, 아오키 이치로(青木一郎)상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여쭤보았다. 다른 손님이 나오지 않으면 괜찮다고 하셔서 최대한 사진을 많이 담아 보려 했다. 마일스 데이비스의 Love For Sale, Milt Jackson Quartet 연주를 듣자니 시간이 멈춘 듯 했다. 마스터가 자신의 취향을 명확하게 안다는 것과 그 취향을 오랜 시간 동안 차곡차곡 쌓아온 결과가 '나만의' 취향으로 가득찬 공간으로 된 것이 멋있고 부러웠다.

 

나오면서 마스터에게 "한국에서 꼭 와야한다고 들어 이렇게 찾아왔느데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습니다. 멋진 공간과 음악에 반해 한동안 잊지 못할거 같습니다. 다음에 다시 꼭 오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더니 정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화답해주셨다. 다음 도쿄에 온다면 이곳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지.

 

 

 

간단히 저녁을 먹고 도쿄에서의 마지막 일정인 'Jazz Spot Intro'로 향했다. 다카다노바바역 근처에 위치. 7시쯤 도착했는데 이미 만석. 마스터가 간신히 마련해준 자리에 착석해 즉흥 연주를 감상했다. 1975년에 문을 연 'Jazz Spot Intro'에 대해 설명을 하자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랜다. 매주 화, 수, 목, 일요일 저녁 6시 30분부터 자정까지 날 것의 라이브 재즈 공연을 보고 듣고 즐길 수가 있다.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싶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도쿄에서 최악이라 여겨지는 출퇴근 시간대의 사이쿄선 혼잡도를 뛰어넘는 인구 밀도, 날것의 그 자체의 매력인 잼 세션, 그렇지만 재즈에 대한 뜨거운 만큼은 도쿄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는 연주자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고 즐기는 여러 나라에서 온 관람객들.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니 'Jazz Spot Intro'의 매력이 더욱 돋보이게 된다. 

 

악기만 있다면 누구라도 연주가 가능한 마법사가 되는 장소라는 표현이 정말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적, 나이, 성별, 인종에 상관없이 악기 하나만으로 재즈를 좋아하는 이유만으로 멋진 공연이 진행되고, 새로운 세션들의 합주가 멋진 바이브를 만들어내는 순간, 이곳의 매혹에 빠졌다. 하모니카 하나만으로 라이브 세션을 하셨던 노년의 신사의 연주는 중간중간마다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이끌어 냈다. 이렇게 멋질 수가. 어떤 말로도 그 시원함을 표현할 수 없었다. 도쿄에서 아름다운 보석을 발견한 느낌이었다. 수십번 도쿄를 다녀봤지만, 이렇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곳은 없었던 거 같은데 이제서야 여길 오다니. 단순히 알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 좋은 장소'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도쿄에 다시 온다면 무조건 하루는 이곳에서 보내야 하는 나의 필수 코스가 될 것 같다. 

 

 

 

 

2시간 정도 정처없이 시간을 보냈을까, 연주에 빠져 정신을 차리니 호텔로 돌아가서 짐을 챙겨야 할 때가 왔다. 다음에 또 올테니 조그마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바에서 나와 다시 호텔로 향했다. 스이카 카드를 충전하기 싫어 (거의 다 써서) 남은 동전을 긇어모으니 티켓을 살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스이카만 쓰다가 이렇게 쓰니 낯설기는 하다. 3일 동안 어쩌다 보니 음악 투어라는 컨셉으로 다녔는데, 대만족이었다. 테일러 스위프트, 블루 노트 도쿄, Jazz Nutty, Jazz Spot Intro 등 음악과 관련된 곳만 다니니 도쿄 여행이 더욱 재미있고 즐거웠다. 벌써부터 다음에는 어디를 갈지 벌써부터 고민하고 있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밤의 도쿄가 정말 아름다웠다. 

 

2024.02.07. 여행 2일차. 

 

 

시간을 보니 벌써 4시다. 숙소에 돌아왔을 때가 2시반이었고, 편히 쉬면서 3시에 발표된 도쿄돔 좌석을 확인하고 공카에서 이런저런 반응을 보다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나갔다. 도쿄돔 좌석이 애니패스에 나타난 순간, 공카 반응이 매우 흥미로웠다. 도쿄돔 좌석이 어디에요라는 일반적인 질문부터 이 좌석 별로일까요, 어떤 의미인지 잘 이해가 안간다는 등 여러 반응으로 가득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스위프티들이 도쿄돔에 왔으니 이런 반응이 나온다는 건 자연스러웠다. 

 

 

몸을 최고의 컨디션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콘서트를 즐기러 가야지. 원래 계획은 지하철을 타고 미타선의 스이도바시역에서 내리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가려니 귀차니즘 발동하여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도쿄돔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코스튬이 점차 변하는게 보였다. 테일러와 함께 하고 싶어, 테일러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것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스위프트의 모습을 보니 나도 가슴이 점차 두근두근거렸다. 

 


 

에라스 투어의 2023년 마지막 콘서트가 끝나고, 11월부터 1월까지 약 3개월동안 테일러 스위프트에게는 많은 일이 있었다. 먼저 타임지가 선정한 '2023년 올해의 인물'이 되어 타임지 커버를 장식하였다. 2017년에도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었긴 당시에는 5명의 다른 여성들과 공동 선정이 된 것이었고, 자신의 본업이 아닌 다른 활동이 선정 배경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연예인 최초로 자신의 본업으로 되었기에 그 의미가 더욱 컸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4년 에라스 투어의 재개를 앞두고 열린 그래미 시상식에서 역사상 최초로 4번째 올해의 앨범상을 수상했다. 그전까지는 시상식 최초로 올해의 앨범상을 세 번 수상한 역사상 네 번째 가수이자 최초의 여가수 기록을 가졌는데 스스로가 자신의 기록을 갱신하며 음악 역사의 새로운 페이지를 만들었다. 어떤 의미냐면 불멸의 아티스트라 할 수 있는 스티비 원더, 프랭크 시나트라, 폴 사이먼도 3번밖에 하지 못한 올해의 앨범상에 그녀는 '1'을 더했다는 것이다. 앨범이 출시될 때마다 그녀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상업적으로도 음악성으로도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사로 잡는 기염을 선보였고 이번 수상을 한 앨범 <Midnights> 앨범은 그 정점에 있는 앨범이었으니 그녀의 수상에는 전혀 이견이 없었다고 본다. 

 

 

 

이번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녀는 자신의 정규 11집 앨범 <THE TORTURED POETS DEPARTMENT>의 발매 예고를 깜짝 발표하였다. 마치 정규 10집 앨범 <Midnights>의 발매 예고를 MTV VMA에서 Video of the Year를 받으며 최초로 깜짝 발표했던 것과 비슷했다. 테일러의 수상에 기뻐하고 있던 나를 비롯한 스위프티들은 그녀의 깜짝 발표에 기절초풍을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2022년 10월에 <Midnights> 앨범이 발매되고, 2023년 3월에 에라스 투어가 시작했으니 따지고 보면 1년 6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투어를 진행하면서 앨범 제작을 했다는 것이다. 이번 앨범 수록곡이 31곡이니, 소처럼 일한다라는 말이 무엇인지 테일러를 통해 증명이 되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마지막으로 테일러의 새로운 남자친구인 '트레비스 켈시'가 뛰고 있는 캔자스 시티 치프스가 슈퍼볼에 진출을 확정하였다. 그때부터 미국 언론들은 테일러가 과연 도쿄 공연을 끝내고 슈퍼볼이 열리는 라스베가스에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내용을 놓고 주요 뉴스로 다뤘다. 메이저 언론들 이외에도 유튜버, 커뮤니티 등에서도 많은 언급이 있을 정도로 캔사스시티 치프스가 슈퍼볼에 진출했다는 것보다 테일러의 이야기가 더욱 많은 관심을 끌었다. 이에 대해 주미 일본 대사관은 공식 트위터를 통해 공식 성명을 발표할 정도였다. 간략히 말하자면 12시간의 비행 시간과 17시간의 시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있게 말하는데, 슈퍼볼이 시작하기 전에 라스베가스에 도착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센스있게 Speak Now, Fearless, Red를 사용한 것은 좋았다지. 한 나라의 대사관이 움직일 정도이니 테일러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믿겨지지가 않을 정도다. 

 

 

 


 

 

택시를 타고 도착한 도쿄돔 시티는 이미 스위프티들로 가득했다. 형형색색의 코스튬을 입고 돌아다니는 그대들을 보면서 역사적인 현장에 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았다. 도쿄를 가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반신반의했는데, 확고하게 결정을 내려서 도쿄에 온게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결정을 한 나를 정말로 칭찬하고 싶다. 하하하하하. 굿즈를 살까도 했지만, 대기에만 거의 1시간 30분 가까이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깔끔하게 포기했다. 굿즈 사려고 했다간 공연을 제대로 보지 못할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돔 앞은 이미 축제 현장이었다. 표현하자면 전세계 스위프티들의 5년만의 정모라고 할 수 있을거 같다. 아시아의 스위프티들은 어떠한 수단을 써서라도 도쿄를 왔야했었고 (나를 포함해서), 미국을 비롯해서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서구권 스위프티들도 도쿄로 몰려들었다고 하니 뉴스로만 보았던 에라스 투어의 파급력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처음 보았을 뿐인데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친해질 수 있었던 곳이 여기지 않았나 싶었다. 서로 말도 통하지 않지만 가까이 가서 '우정 팔찌'를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감정을 느낀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지구 평화가 여기서 이루어지는구나. 정말 테일러 스위프트는 우주 대통령이라는게 느껴진다.

 

공카에서 만난 몇몇 한국 스위프티들을 공연 시작 전에 만났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낯선 느낌은 전혀 없고 오랜만에 본 친구처럼 '우정 팔찌'를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교환하고, 테일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주고, 정신없이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보니 공연은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공연 중인 것처럼 텐션은 매우 높아졌다. 빨리 공연을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공연까지는 이제 1시간 남짓 남았다. 공카분들과는 재미있게 즐기라고 서로 인사를 한 뒤, 입장 게이트로 이동했다. 보안이 까다로울 줄 알았는데 생각한 것보다는 그렇지 않았다. 애니패스 앱을 켜서 QR 코드로 본인 확인을 한 뒤, 별도의 짐이 있다면 따로 검사하는 것 이외에는 입장의 난이도는 어렵지 않았다. 드디어 도쿄돔에 입성이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이지만, 나에게는 테일러와 함께하는 공간이다. 

 

 

 

드디어 공연장에 들어왔다. 벌써 자리는 많이 차여 있었다. 저 멀리 VIP석도 사람들로 바글바글. 처음에는 S석이라 시야제한석일까봐 걱정이 앞섰는데, 그렇게 나쁜 자리는 아니다. 아주 또렷하게 테일러를 보는 것은 못하지만 공연 무대를 넓게 볼 수 있으니 이거라도 만족할 따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VIP 구역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욕심을 조금만 더 내볼껄.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계속 떨리는 마음으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필시 나 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닐까.

 

6시가 가까워지자, 대형 스크린에 보여지고 있는 시계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6시가 되는 순간 공연장의 모든 빛이 꺼지더니 스크린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Miss Americana' 음악이 흘리면서 댄서들이 화려하게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왜 비명을 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좋아서 그런거 같았다. 그리고 댄서들 가운데서 테일러가 등장하는 순간, 도쿄돔은 환호, 감탄, 기쁨의 소리로 가득찼다. 그리고 대망의 'Cruel Summer'이 흘러나오는 순간 또 다른 비명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영화로 이미 보고 와서 기분이 덜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그냥 좋아서 괴물 같은 내 목소리지만 테일러가 부를 때 따라 불렀다.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인데 공연장은 이미 절정의 순간이었다. "Hello, Tokyo!"라고 말할 때는 도쿄돔 무너지는 줄 알았다. 

 

20대 때는 수많은 공연을 다녔지만 나이가 들다보니 이러한 공연을 가는 것도 낯설었다. 하지만 큰 마음을 먹고 여기에 오니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학창시절로 돌아간 듯 공연을 즐기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내가 좋아하는 가수가 있으면 꼭 가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3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공연하는 테일러를 보며 내 생애 언제 이런 공연을 다시 갈 수 있고 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테일러의 체력이 대단하고, 자신의 무대에 매우 열정적인 모습을 보며 테일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눈물이 흘렀다.우리의 윗세대가 비틀즈, 마이클 잭슨의 시대를 살았더라면 나는 테일러의 시대를 경험하고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정말 잘 왔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켓 가격도 전혀 아깝지도 않았고 그 이상의 만족을 얻었으니까 뭐가 부족하랴. 데뷔 앨범부터 최신 앨범까지 10개의 시대를 관통하며 같이 테일러의 팬으로서 있었구나라고 새삼 추억이 소록소록 들었다. 나 정말 여기 온거 잘한거 같아, 스스로에게 칭찬해줘야지. 

 

 

 

 

 

 

 

 

마지막 곡 'Karma'가 끝나며 컨페티가 휘날리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3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더 해줘도 좋은데, 이대로 보내기 아쉬울 정도였다. 괜히 하루 공연만 티켓을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카에서 4일 공연 내내 간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도 그럴게 할 걸. 아쉽다. 내 인생 언제 다시 테일러의 콘서트를 갈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올까. 앞으로 몇 달간은 오늘 하루의 추억으로 버티고 오늘을 기억하고 힘을 내면서 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굿즈를 아니 살 수 없었다. 도쿄돔에서 빠져 나오는 사람들, 굿즈를 사기 위해 줄서는 사람들, 도쿄돔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 등이 한꺼번에 모이니 정신이 없었다. 일반 머챈을 사기에는 긴 줄을 기다리는게 자신이 없어서 (이때 어느 정도 체력이 망가진 거 같은 느낌) 타워레코드 굿즈라도 사야지하고 줄을 섰다. 그나마 짧은 줄이었다. 15분쯤 줄을 서서 기다리니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뭘 살까 고민을 하는데 뒤에서 사람들이 기다리니 얼른 빨리 골라야했다. 그래서 결국 고른것은 'Midnights' 앨범 LP 2장! 어차피 살거, 여기서 사는게 낫겠지. 돈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도쿄 공연이 끝나고 몇일 뒤에 나온 일본 뉴스를 보니, 약 3,000억원에 가까운 경제효과가 4일간 발생했다고 한다. 전년도 동기간 비교해서 22만명의 방문객이 증가를 했고, 도쿄도 한정으로 세금이 200억 가까이 추가로 증가했다는 것은 덤이고. 이러니 각 나라 정치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공연을 해달라고 요청하는게 십분 이해가 갔다. 나같아도 그럴 듯.

 

 

 

 

정신 없이 갑작스럽게 온 도쿄였지만 정말정 단 한톨의 먼지만큼의 후회도 들지 않은 공연이었다. 이제 5월부터 유럽 공연이 시작되는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야지. 내한도 해줬으면 좋겠다. 몇배의 가격을 내더라도 후회하지 않을테니 제발제발 꼭! 공연의 여운에 빠져서, 행복의 극치를 느껴서 도쿄에서의 두번째 밤은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2024.02.06. 여행 첫날. 

 

 

나리타에 도착. 짐을 찾고 입국 수속을 마치고 나리타 익스프레스를 타고 도쿄로 향했다. 마치 집에 오는 것처럼 모든 것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처럼. 최종 목적지는 신주쿠역이 아닌 도쿄역이다. 신주쿠를 벗어나 새로운 곳에 머물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도쿄역 근처에 기대 이상으로 좋은 호텔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도쿄역에서 내려 마루노우치구치로 나왔다. 압도적인 풍경의 도쿄역 분위기는 항상 올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일본 철도의 중심이자, 일본 근대 역사의 상징이기도 하니까. 도쿄역 구경은 이곳에서 신칸센을 탈 때 제대로 하기로 결심하고 택시를 타고 이동을 하였다. 도쿄역 주변 빌딩 숲을 지나 고쿄를 둘러싼 도로를 따라 20분 정도 갔을까. 앞으로 3일 동안 머물 호텔 그랜드 아크 한조몬에 도착했다.

 

비록 1개 노선이지만 도쿄 중심을 지나는 한조몬선이 5분 거리에 있고, 창밖으로 매력적인 도쿄의 스카이라인이 보이고,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가 열릴 도쿄돔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여기를 오게 되었다. 신주쿠나 시부야의 거대하고 신식 호텔과는 달리 오래됨고 투박스러움이 이곳저곳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고쿄의 외곽과 일본 정부의 주요 건물들 그리고 도쿄 타워가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은 그랜드 아크 한조몬만이 제공할 수 있는 비교 불가능한 멋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잠시 숙소에서 눈이 쌓인 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쉬다가 밖으로 나섰다. 목적지는 진보초역. 한조몬역에서 2정거만 가면 된다.  골목 곳곳에 조용히 숨어 있는 카페를 찾아다니고 커피를 마시는 나에게 진보초는 숨겨진 보물 같은 공간이다. 그리고 도쿄의 수많은 재즈 킷사 중 하나인 'Jazz Big Boy'는 이러한 나의 취향을 만족시켜주는 공간이다. 

 

카페에 들어갔을 때, 마스타와 바에 앉은 중년 신사밖에 없었다. 대화가 완전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말소리가 나는 때는 마스터와 간단한 이야기를 할 때 뿐이었다. 바 테이블, 2인석 테이블 3개밖에 없는 단촐한 구성이지만 뛰어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끊임없는 재즈의 흐름에 저절로 녹아드는 환경이 너무 좋았다. 도쿄가 참 좋은게 재즈 킷사가 수십 곳이 있고, 취향에 맞는 재즈 킷사에 가서 마스터에게 언제든지 가서 재즈에 대해 물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 없이 틀어주는 재즈를 감상하며 마스터의 핸드 드립과 선곡 센스에 감탄하며 계속 머물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저녁 일정이 있어 카페를 나갈 때 마스터에게 도쿄의 멋진 라이브 재즈바를 추천해달라고 했더니 몇군데를 추천해 주시며 어디가 좋고 어떤 특징이 있고 이것저것 설명을 해주시는데 새삼 그 친절함에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에 꼭 오라는 말도 덧붙이며. 당연히, 다시 오겠습니다. 꼭! 

 

 

 

 

숙소로 돌아와 잠시 쉬었다. 실은 한국 출발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고 이대로 돌아다니면 앞으로의 일정이 다 엎어질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전날 내렸던 눈 때문에 서울보다는 따뜻하지만, 살짝 한기가 느껴지는 저녁이라 몸을 최대한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살짝 쉬었더니 몸이 좋아진걸 느껴 다시 저녁 일정을 소화하러 밖으로 나섰다. 이번의 목적지는 미나미 아오야마.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 다음으로 가장 기대한 일정이기 때문이다. 오모테산도역에서 내려서 오늘 밤을 화려하게 밝혀줄 장소로 향했다.

 

 

 

화려한 미나미 아오야마의 밤거리를 10분쯤 걸었을 무렵, 오늘 밤을 멋지게 마무리 할 수 있는 '블루 노트 도쿄'에 도착했다. 일본이 자랑하는, 어쩌면 본점인 뉴욕 블루 노트보다 더욱 고급스러움을 지닌 재즈바. 만화책 '블루 자이언트'를 보면서 언젠가 도쿄에 다시 가게 된다면 이곳에 꼭 와야겠다는 마음이 가득했는데, 결국 소망을 이루게 되었다.

 

 

 

블루 노트 도쿄에 오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도쿄 여행 중에 블루 노트 도쿄를 갈 수 있는 일정은 2월 6일 단 하루뿐이었다. 이날 공연자는 유명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뉴에이지 아티스트인 하카세 타로였기에 좌석은 이미 마감. 너무나도 아쉬워 혹시라도 빈자리가 있기를 빌며 틈틈히 홈페이지를 찾아 예약 여부를 확인하였다. 정말 절실했다. 블루 노트 도쿄가 아니라면, 코튼 클럽을 대신 갈 생각이었지만 그래도 하카세 타로와 블루 노트 도쿄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진다고 했나. 공연 4일전? 큰 기대 없이 홈페이지에서 예약 가능 여부를 훑어 보는데, 좌석 1개가 예약 가능하다고 보였다. 사이드쪽 자리였지만, 뭐가 중요하랴.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비싼 가격(16,500엔)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예약을 마무리지었다. 마침내 이 특별한 순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블루 노트 도쿄에 입장하는 순간 역사적인 재즈 뮤지션들의 반가운 얼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넓은 홀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2부 공연은 8시 30분부터 시작인데도 일찍 와서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여유가 표정에서 느껴졌다. 나도 오늘의 공연을 마음껏 즐겨야지. 코트를 맡기고 잠시 기다렸을까, 입장 번호를 부르니 사람들이 호출하는 번호에 따라 입장을 한다. 

 

 

 

다시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드디어 공연장이 눈에 들어왔다. 최근 도쿄의 많은 클럽과 공연장에서는 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촬영을 금지하는 경향이 매우 높다고 한다. 관객의 입장에서는 공연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 한장을 가질 수 없다는게 아쉽기는 하지만 쾌적한 공연 환경을 아티스트와 관객 모두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공연 주최측의 조치이니 잘 따르는게 좋을거 같다. 그리고 사진을 찍다보면 공연 자체를 즐기기 보다는 사진 찍느라 정신이 없어 공연에 신경쓰지 못하니 오히려 이런 노력이 훨씬 좋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공연 시작 전까지 공연장 이곳저곳을 기념으로 남기고 싶어 찍었다. 저녁을 이미 먹었기에 오늘에만 제공하는 하카세 타로 스페셜 칵테일 'LADS IN TOWN'를 주문하고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유롭게 분위기를 느꼈다. 

 

 

 

"하카세 타로 & The LADS" 데뷔 공연은 말 그대로 강렬함이 느껴져 눈물이 찔끔 났다. 중간 중간 MC를 하며 밴드를 만든 계끼, 코로나 시기때의 어려움, 영국에서 귀국하기까지 등 여러 이야기를 꺼내며 그간의 노력이 멋진 공간에서 보여지게 되어 감사하다는 말을 계속 표현하였다. 첫 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온전히 빠져들고 환호하게 만드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밴드를 어디가서 볼 수 있겠는가!  하카세 타로를 비롯해서 기타의 아마노 케이, 드럼의 야시키 고타, 첼로의 카시와기 히로키 등 밴드 멤버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적 팀워크는 화려했다. 블루 자이언트의 JASS의 공연이 이런 느낌이었을려나.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짜릿함이었다. 내심 앵콜을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앵콜 공연은 없었다. 같은 앉았던 자리의 분들에게 인사를 하고 (어느덧 친해져서 아쉬움) 블루 노트 도쿄 밖으로 나왔다. 어느덧 10시 무렵, 밖에는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가려는 사람들을 모시기 위한 택시들이 줄서 있었다. 

 

큰 기대를 하고 왔는데 기대 이상의 만족을 느꼈다. 서늘한 2월의 밤이었지만, 도쿄에서 푸른 밤을 느껴서 즐거웠다. 내일은 더더욱 즐거운 날이 될 예정이니 슬슬 호텔로 돌아가야지. 

 

 

 

 

2024.02.06. 여행 첫날. 

 

 

4개월만에 다시 가는 도쿄. 이번에 도쿄를 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테일러 스위프트 'The Eras Tour' 도쿄 콘서트에 가는거다. 2023년 북미와 남미 투어로 전 세계를 휩쓸었던 스위프트 열풍이 2월 7일 도쿄 콘서트를 시작으로 다시 시작된다. 어떻게든 가고 싶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싱가포르에서만 콘서트가 진행될 예정이었기에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못볼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콘서트를 가고 싶어 리셀표를 사고자 하루에 몇번이나 티켓잼을 들락날락거렸다. 혹시나 좋은 가격대의 티켓이 있을지 희망을 하며. 간절하면 꿈이 이뤄진다고 했던가. 내가 생각하던 범위의 가격대의 티켓을 찾을 수 있었고, 리셀러 분과 디테일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도쿄행 티켓을 구했다.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 티켓을 얻은 동시에, 비행기와 호텔도 재빠르게 구매를 마쳤다. 이제 도쿄만 가면 된다.

 

드디어 2월 6일 출국날이 되었다. 싸늘함이 여전히 느껴지는 새벽 분위기를 뚫고 도착한 인천공항 1터미널. 정말 오랜만이다. 3~4년전에 홍콩 갈 때 이후로는 처음이다. 계속 대한항공만 이용해서 2터미널만 다니다보니 낯선 느낌이다. 새벽임에도 사람들로 가득하고 분주했다. 아침 일찍부터 저마다의 목적지로 가고 싶어하는 즐거움이 얼굴에서 보이는 듯 하다. 

 

출국 심사를 마치고, 주문한 면세품을 찾고, 아시아나 항공 비즈니스 라운지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개인적으로 아시아나 항공 비즈니스 라운지가 대한항공의 그것보다 좋다는 생각이다. 규모, 깔끔함, 새로움 등에서는 대한항공 비즈니스 라운지와 비교할 수 없겠지만, 아시아나 항공 비즈니스 라운지는 자체만의 매력이 있다. 특히 먹을 것에서. 풍부하고 다채로운 음식들을 제공하고 있어 아침 일찍 공항에 오는 사람들의 배고픔의 니즈를 정확히 공략하고 있어 인기가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의 경영 악화가 아니었다면, 대한항공의 그것처럼 장소도 대규모로 만들고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실은 슬프게도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상태에서 이정도의 퀄리티를 변함없이 제공하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경험했다. 

 

 

 

출국 시간이 가까워져 게이트로 향했다. 아시아나 항공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A380 기종 때문이었다. 한번쯤은 타고 싶었는데 그렇다고 뉴욕, LA를 당장 갈 수 없으니 도쿄라도 이렇게라도 가고 싶었다. 팬더믹까지는 대부분의 기종이 퇴역 예정있어지만, 팬더믹 이후 급격히 증가한 여행 수요에 의해 다시 상업 운행을 하게된 A380의 운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궁금해진다. 

 

티켓 구매를 할 때 스타리움 비즈니스석을 노렸지만 이미 만석. 아쉽지만 2층 비즈니스석으로 선택하였다. 나리타로 향하는 동안 후지산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우측 창측을 선택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서울도 그렇지만 도쿄에도 흔하지 않은 폭설이 내렸다고 하니 후지산을 보는 건 어려울 듯 싶은 걱정이 앞섰다. 그리고 실제로 후지산 근처는 구름으로 짙게 가려져 있어 후지산의 끝자락도 보지 못했다. 

 

 

 

전날 내렸던 눈 때문인가. 비행기 날개에 쌓여 얼어붙은 눈을 제거하느라 이륙이 늦어졌다. 비행기의 눈 제거를 저렇게 하다니, 신기하게 느껴진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이제 곧 이륙한다는 기장의 안내 방송이 나왔다. 4개월만에 도쿄에 가서 기분이 좋은 것도 있지만,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를 직접 보게 된다는 기분이 커서 마음을 가라 앉힐 수가 없었다. 나름대로 콘서트 기분을 내고 싶어 엣시에서 '우정 팔찌'도 주문했지만, 출국 전날까지도 도착하지 않아 콘서트와 관련된 어떠한 악세서리나 코스튬도 하지 못해 제대로 준비 못한 나를 탓한다. 그래도 가서 실컷 즐길 것은 변함이 없다. 

 

 

 

 

 

이륙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좌석 벨트 사인이 꺼졌다. 비행기도 구경할 겸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을 구경했다. A380은 생각 이상으로 컸다. 특히 화장실이! 일반 비행기의 화장실과 비교하면 여기는 천국이구나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따. 여기서 누워 가도 좋을 정도로? 화장실 사용을 기다릴 때도 넓은 좌석에 앉아서 기다릴 수 있다는 것도 좋아보였다. 아시아나의 A380 인테리어가 이렇게 좋다면 다른 항공사의 A380 인테리어도 궁금해질 따름이다.

 

기내식을 먹고 도쿄에 도착하면 무엇을 할까 이런 저런 계획을 짜보았다. 사실 이번 여행은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테일러 스위프트 콘서트가 주된 목적이라 어디를 꼭 가야한다라는 일정상의 압박은 없어서 편하게 다닐 생각이었다. 그래도 다시 오는 도쿄에서 의미있는 시간을 풍부하게 지내고 싶어 '도쿄 음악 투어'라는 나름대로의 테마를 생각해보았다. 실제로 음악과 관련된 몇몇 장소를 구글맵에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허락되면 꼭 가봐야지.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어느새 도쿄 상공에 가까워졌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고 착륙 준비를 한다. 도쿄 하늘은 흐리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게 비행기 창문을 통해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나리타 공항에 비행기는 사뿐히 착륙을 하였다. 

 

다시 만나서 반가워, 도쿄. 

 

 

 

 

23.09.24 

 

도쿄의 아침은 화창함 그 자체. 구름 한점 없는 파란색 하늘이다. 떠나는 날, 이렇게 날씨가 맑다니. 청량한 하늘을 보는 건 좋지만 오늘에서야 이런 날씨를 본다는 건 억울할 따름이다. 

 

 

 

 

나리타 공항까지는 공항버스 리무진을 탔다. 공항까지의 시간은 나리타 익스프레스와 엇비슷하지만, 마지막까지 도쿄 타워와 레인보우 브릿지 그리고 도쿄만을 거쳐서 지나는 멋진 경관을 볼 수 있어 리무진이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혹시 리무진을 타게 되면 운전기사 기준 오른쪽에 앉으면 오다이바와 도쿄만을 보는 대신 도쿄 타워를 보기가 어렵고, 왼쪽에 앉으면 도쿄 타워와 신주쿠 교엔을 볼 수 있다. 리무진은 도쿄 도심을 순환하는 수도고속도로를 따라 움직인다. 수도고속도로 신주쿠선(4번 노선)을 타고 계속 가다보면 어느샌가 요요기 공원과 신주쿠 교엔을 지나쳐 어느샌가 수도고속도로 도심환상선(C1 노선)으로 진입한다. 여기서 도쿄 타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도쿄 타워가 금새 눈에 보였다가 빠른 속도로 뒤로 사라지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도쿄 도심과는 안녕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쉬워할 수는 없지. 수도고속도로 도심환상선에서 벗어나 수도고속도로 다이바선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레인보우 브릿지, 오다이바, 도쿄만을 마지막으로 감상할 시간이다. 날씨가 덕분인지, 아름다운 것들이 더더욱 아름답고 멋지게 보인다. 왜 하필 돌아가는 날에 청량한 하늘이 되는 것인지 하늘도 참 무심하다. 리무진이 천천히 가기를 바라지만, 아니 교통 체증이 있기를 잠시나마 바랬지만, 도로는 막힘이 하나도 없이 쭉쭉 뻗어간다. 그리고 수도고속도로 완간선으로 진입한다. 이제 공항까지 쭉 가면 된다. 정말로 도쿄와 작별의 인사를 할 시간이다. 

 

 

 

 

리무진은 나리타 공항 3터미널, 2터미널 순서로 사람들을 내려주고 1터미널에 도착했다. 남쪽 윙이 스타얼라이언스 본진이라면, 북쪽 윙은 스카이팀 본진. 북쪽 윙이라고 하니, 나카모리 아키나의 8번째 싱글 '북쪽 윙(北ウイング)이 떠오른다. "날 좋아해 준 사람들이 북쪽 윙에 갔을 때 웃을 수 있는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며 아키나가 직접 붙인 제목이라는데 갑자기 흥겨워지는 느낌이다. 

 

映画のシーンのように
영화의 한 장면처럼
すべてを捨ててく Airplane
모든 것을 버리는 Airplane
北ウイング 彼のもとへ
키타윙 그의 곁으로
今夜ひとり
오늘 밤 혼자
旅立つ
여행을 떠나요

 

대한항공 카운터에서 티켓과 여권을 보여주고 잠시 기다리는데, 직원이 갑자기 티켓 변경이 되었다고 말을 해준다. 좌석이 바뀌었나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고 돌아온 대답은 이와 같았다. 

 

"특별하게 오늘은 퍼스트 클래스로 업그레이드하여 모시겠습니다" 

 

응??응???? 뭐라고???? 퍼스트 클래스??? 다시 귀를 의심하였지만, 받아본 티켓에는 '01A'라는 번호가 선명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니 진짜 퍼스트 클래스이게 맞다. 도쿄에 올 때 퍼스트 클래스를 탔는데 (퍼스트 클래스 후기), 한국에 돌아갈 때 다시 퍼스트 클래스라니. 아니 우주의 기운이 이렇게 오는 것인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다. 한번도 아닌 두번 연속 퍼스트 클래스라니. 돌아가면 로또를 꼭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필시 로또를 사라는 운명의 징조라고. 날아갈것만 같은 산뜻한 기분으로 스카이팀 Priority 고객 전용 패스트트랙을 통과해 보안 구역에서 출국 심사까지 마치니, 도쿄와 작별할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는게 느껴진다. 

 

 

 

나리타 공항의 대한항공 라운지는 스카이팀 공용 라운지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작다. 인천공항 라운지와 비교한다면 수수하고 아담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나리타 공항 자체가 오래되어 터미널의 확장 공간이 없다는 것도 원인이겠지만, 원월드의 일본항공과 스타얼라이언스의 전일본공수의 허브 공항이다보니 상대적으로 스카이팀에게 제공 가능한 공간이 제한 될수 밖에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배경이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이러한 이유로 라운지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도 한정적이다. 삼각 김밥 4종류, 가벼운 스낵, 커피를 비롯한 주류 등? 이정도가 전부이다. 예전에 이용했던 전일본공수 라운지에서는 쉐프가 직접 우동, 스시 등을 만들어주었을 뿐더러 개인 좌석도 매우 넓어서 매우 마음에 들었는데 대한항공 라운지는 그게 아니다보니 살짝 아쉬움 마음이다. 

 

이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나리타 공항의 대한항공 라운지가 좋은 이유를 딱 하나만 말해보자면 활주로가 보인다는 것이다. 실시간으로 비행기 이착륙을 볼 수 있어 날씨가 좋다면 멋진 장면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다. 자리가 비록 협소하지만 (생각보다 의자가 편하지 않음) 창가에서 이착륙 장면을 보고 있으면 어떤 이유에서는 모르겠지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느낌이 든다. 여행을 마무리해서? 집에 돌아가서? 비행기를 보니 좋아서? 글쎄 잘 모르겠다. 

 

라운지에 들어오자마자 화이트 와인을 마셨는대도 비행 탑승 시간까지 아직도 1-2시간이 남아 생맥주를 2잔 마신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여행 내내 읽지 못했던 <the Nineties>를 읽다보니, 어느새 탑승 시간이 되어 라운지를 나선다. 

 

 

 

게이트 앞에서 짧은 대기를 마치고 가장 먼저 탑승권 확인을 한 후, 보딩 브릿지로 향한다. 일본에 올 때도 가장 먼저 탑승하는 경험을 했는데, 이번에도 똑같은 영광을 다시 체험하다니.  

 

한번 경험을 해봐서, 퍼스트 클래스를 탄다는 흥분된 기분이라기 보다는 차분한 감정이 커서 경험의 차이가 역시나 큰 차이를 주는구나라고 생각이 든다. 다만 다른 것은 몰라도 기내 좌석만큼은 편했으면 하는 소원이 있었다. 지난번에는 코스모 슬리퍼라 전체적으로 편하게 왔지만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을 거의 이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니 이번에는 그렇지 않기를 빈다. 

 

 

 

 

비행기에 탑승하자 승무원이 좌석으로 안내를 해준다. 다행히도 지난번과는 다르게 프레스티지 플러스 형태의 좌석이다. 보잉 777-200ER 기종으로 보이는데 기존에 있었던 코스모 슬리퍼를 제거하고 프레스티지 플러스로 대체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아무래도 도쿄와 인천 수요가 많다보니 이렇게 변형을 하게 되지 않았나 추정이 된다.

 

잠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승무원께서 웰컴 드링크를 가져다 주신다. 지난번에는 오렌지 쥬스만 마셨지만 이번에는 웰컴 드링크 전부를 선택하였다. 언제 다시 퍼스트 클래스를 타보겠다. 이럴때 맘껏 호사를 누려야지. 도쿄행일때는 퍼스트 클래스가 만석이었는데 이번에는 만석은 되지 않았다. 다행히 내 옆자리는 아무도 앉지 않아 좀 더 편하게 마지막 여정을 즐길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든다. 퍼스트 클래스에 앉으니 몸이 이제 사르륵 녹는듯한 느낌이다. 지난 4일 동안 정말 열심히 이곳저곳을 다닌 것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다음에도 이렇게 열정적으로, 전투적으로 다닐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덧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이동을 한다. 이제 정말 가는구나. 

 

 

 

이륙한 비행기는 어느새 도쿄 상공을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 후지산의 모습이 점차 보이기 시작한다. 다행이다 날씨가 맑아서. 후지산을 볼 수 있어서. 날씨가 맑다 하더라도 후지산 주변은 구름이 많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오늘은 구름이 많지만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니 마음이 놓인다. 

 

나리타 공항에서 이륙한지 10-15분이 지났을려나. 후지산을 가장 가까이 지나는 타이밍이다. 멀리서도 저게 후지산이라는게 느껴진다. 지난 3월에 바라본 후지산은 아직도 추워서 정상 부군이 눈으로 뒤덮여 있었던 반면(생각 이상으로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이번에는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름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 정상 부근의 눈이 사라져 있다. 참고로 후지산을 보려면 인천에서 도쿄를 갈 때는 오른쪽 좌석, 도쿄에서 인천을 갈 때는 왼쪽 좌석에 앉아야 한다. 

 

 

 

후지산은 해발 고도 3,776m라고는 하지만 상당히 높은 등반 난이도가 있다고 한다. 게다가 한라산처럼 1년 내내 개방하는 것이 아닌 7,8월 단 2개월만 등반을 허락하기에 그때는 엄청난 인파로 붐빈다고 한다. 언젠가 누군가의 후지산 등반기를 읽어보았는데 (후기는 여기로) 힘든 과정이 너무나도 자세하게 묘사되어 힘들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후지산 정상에서 일출을 바라보고 싶은 욕망 아닌 욕망이 생겼다. 지금은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보고 있지만 내년 여름에는 후지산 등반을 해봐야지. 그리고 그전에 체력도 키우고 그래야겠다.

 

 

 

서서히 멀리 멀어져가만 가는 후지산을 뒤로 한채 기내식이 준비가 되었다. 이번에는 특별하게 사전 주문을 하지 않아, 메뉴 중에 스테이크를 선택한다. 사실 공항에서 다과 등을 많이 먹어서 살짝 배가 부른 상태였는데도 마지막 기내식을 즐기기 위해 억지로라도 먹어야지. 아니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다 먹어야지. 와인은 마시지 않는 것으로. 여기서 더 마시면 취해서 그대로 쓰러져 버릴거 같아 와인은 과감하게 포기하고 콜라로 대신했다. 포만감도 몰려오고, 여행의 긴장감도 풀리고, 집에 돌아간다는 기쁜 마음이 겹쳐 눈이 조금씩 감긴다. 커피를 마실까하다, 1분이라도 더 잠을 자고 싶어 기내식을 후다닥 치우고 좌석을 180도로 조절한 뒤 시트를 덮고 잠을 잔다. 오래 잠은 못자겠지만 1시간정도면 꿀잠을 잘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얼마나 잤을까. 어느덧 비행기는 인천국제공항과 가까워지고 있다. 승무원들도 착륙 준비를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나도 좌석을 다시 원위치로 하고 필요한 것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가방에 넣는다. 그리고 시간을 때우고 싶어 밖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저 아래에 매우 낯익은 건물들과 도로들이 눈에 보인다. 엇? 저기 내가 사는 동네자나! 자세히 보면 어디에 우리집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다. 비현실적이고 절대로 발생하면 안되겠지만, 여기서 바로 뛰어내려 바로 집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다. 언제 공항에 도착해서 다시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와야하는지를 더더욱 생각하면 말이다. 

 

 

 

공항까지는 착륙까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왔구나라는 안정감이 들면서도 내일부터 현실로 다시 돌아갈 것을 생각하면 살짝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도쿄에서 정말 좋은 기억들과 생각들을 만들고 와서 가끔씩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버틸 수 있는 비타민이 될 것이다. 도쿄 여행을 보내준 와이프에게 가장 크게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고, 스스로에게도 이것저것 보러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수고했다고 말해줘야지. 

 

 

 

이렇게 즐거웠던, 잊혀지지 않을 4박 5일 도쿄 여행이 끝났다. お疲れ様でした。

 

23.09.23.

 

 

야나카 긴자 구경을 즐겁게 마무리 했으니,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이동한다. 목적지는 카미샤쿠이역. 이곳에 가는 목적은 단 하나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라면을 먹기 위해서. 이번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도쿄보다 도쿄 주변을 많이 구경하고 있다. 마쿠하리, 초후, 히요시,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카미샤쿠지이까지.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다녀야지. 

 

 

 

니시닛포리역에서 카미샤쿠지이역까지는 50분 정도? 이케부쿠로역에서 갈아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타카다노바바역에서 갈아타는거 이동 거리를 잠시나마 줄일 수 있을거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가기로 했다. 타카다노바바역은 일본 전체 전철역 승하차량에서 전체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단, 도쿄 서부 지역 직장인들의 출퇴근을 맡고 있는 세이부 신주쿠선이 지나가고 (세이부 신주쿠역이 종점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하차하는 편이다), 게이오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세다 대학(정확히는 니시 캠퍼스), 가큐슈인 대학, 가쿠슈인 여대 등 주요 대학교가 몰려 있다보니 사람들로 매번 붐빌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다만, 야마노테선과 세이부 신주쿠선의 환승은 개념 환승의 정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마음에 든다. 시간이 되면 와세다 대학 구경도 하고 싶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다음에 방문하자. 

 

 

 

 

세이부 신주쿠선을 타고 얼마나 갔을려나, 드디어 카이샤쿠지이역에 도착했다. 5분만 걸어가면 아주 특별한 라멘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떨린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를거다. 코로나 이전에는 출장 때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지난 3월에 왔었을 때는 가게가 쉬는 날이라 아쉬움을 머금고 돌아서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여기까지 왔다. 

 

드디어 가게에 도착했다. 저녁 영업이 시작하기까지는 10분 정도 남았다. 브레이크 타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내 앞에는 벌써 2명의 대기자가 줄을 서서 가게가 오픈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이분들도 나처럼 특별한 라멘을 먹으로 오셨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옷차림을 보니 일부러 여기까지 온 사람은 아닌거 같고 동네 주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가게 문이 열렸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가게로 들어간다. 오랜 시간, 이 순간이 오기를 학수고대만 했는데 드디어 실현이 되는거 같아 거대한 기대감과 기쁨만이 가득한다. 

 

 

 

 

키오스크에서 라멘과 교자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꿈이 이루어져서 그런가, 흥분만이 나에겐 가득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라멘과 교자가 나왔다.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어디에서나 판매하는 그런 라면과 교자처럼 보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특별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평범한 라멘과 교자에 나는 왜 집착아닌 집착을 보였을까. 그 이유는 바로. 

 

『'빛의 전사 마스크맨 (일본명: 光戦隊 マスクマン)』

 

여기에 온 이유는 '빛의 전사 마스크맨' 때문이었다. 초딩 때 본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입학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면 항상 후뢰시맨, 바이오맨과 함께 3대 전대물로 불렸던 '빛의 전사 마스크맨'의 레드 마스크가 배우 은퇴를 하고 운영하는 라멘 가게라 시간을 내서라도 오고 싶었다. 팬이라면,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면 당연히 와야하는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1987년 2월에 첫 방영을 했으니 3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토리가 선명하게 기억나고 오프닝은 아직도 쉽게 따라 부를 정도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80-90년대의 황금 시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엔 미지의 힘이 숨겨져있다. 단련시키면 시킬수록,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 빛의 전사 마스크맨 '한국판 오프닝'

 

 

▶ 빛의 전사 마스크맨 '일본판 오프닝'

 

 

레드 마스크 역을 맡으셨던, 마스크맨의 주인공은 사장님(본명 이나바 가즈노리)은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드셨지만, 아직도 얼굴에서는 옛 모습이 많이 보인다. 레드 마스크로 활약하던  그 시절을 보면 잘생김 그 자체라고 느껴질 정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사람은 잘 생겨야 한다. 남자라면 잘생겨야 한다. 

 

혹시나 사진을 찍는게 가능할까 싶어 정중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여쭤보았는데 안된다고 거절을 하셨다. 아무래도 나 같은 덕후들이 많다보니 매번 이렇게 사진을 찍자는 요구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영업 중인데 다른 손님께 폐를 끼친다고 느껴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아쉬워서 요리하시는 뒷모습이라도 찍었다. 고마워요 레드 마스크ㅠㅠ 

 

 

 

레드 마스크 이후 몇 번의 작품을 하셨지만 이후 완전히 배우 일을 그만 두시고 이곳에서 라멘 가게를 운영하시는데, 가게에는 여전히 마스크맨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시던지, 초상화를 비롯하여 각종 마스크맨 관련 굿즈들을 전시해두고 있으셨다. 사장님은 더더욱 그러시겠지만, 나도 전시되어 있는 각종 포스터, 굿즈 등을 보면서 마스크맨을 정말로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비디오 가게에 가면 마스크맨 최신편을 빌려서 집에서 몇번씩 돌려보고, 동네 친구들과 액션 포즈를 하면서 놀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언제 다음편 나오는지 물어보고. 그리고 최신편이 나오면 엄마한테 돈 받아서 최신편을 빌리러 가고.그리고 레드 마스크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지게 변신해서 지구를 지켜야지라고 상상도 했었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던 그 어린 시절이었다. 

 

지금 우리가 <해리포터> 1편을 추억하듯, 아재들이 <나홀로 집에>를 추억하듯. 여기서 중요한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닙니다. 솔직히 <나홀로 집에>. 이거 잘 만든 영화 아니거든요. <해리포터> 1편? 시작적으로는 훌륭하긴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아쉽습니다.

중요한 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니가 그때 10살이었다는 거죠.

- 부기영화, 범블비 리뷰 중. 

 

 

라멘을 다 먹고 추억에 쌓여 가게를 나오는데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사장님이 다시 가게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 악수를 청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있어 영웅이었습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감사합니다"라고 웃으시면서 대답을 해주셨다. 정말 기뻤다. 팬이라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한때 어렸을 때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봤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만족을 경험한 느낌이다. 

 

 

 

 

 

 

기쁨이라는 감정만을 마음에 가득 담아 다시 신주쿠역으로 돌아간다. 카미샤쿠지이역에서 개찰구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뭔가 낯읽은게 눈에 보여 잠시 다가가서 보았다. 그것은 오늘의 세이부 라이온즈 경기 결과표였다. 치바 롯데와의 경기에서 2-1로 세이부 라이온즈가 승리한 결과를 이렇게 역무실 앞에서 보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은 세이부 철도, 내가 타는 열차는 세이부 철도에서 운영하는 열차.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기를 놓친 사람들에게도 역에서 내리거나 탈 때 보여주는게 예상외의 센스라고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대부분 경기 결과를 확인하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사람들도 있을테니 이러한 배려 혹은 한번이라도 홍보를 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해 짐 정리를 끝내고, 이대로 마무리 하기 끝내기가 싫어 어제 갔던 뮤직바를 다시 간다. 홋카이도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며  King Gun의 '白日'을 신청해 듣고 기분 좋은 마음을 여전히 유지한채 바를 나왔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택시를 잡고 도쿄 타워를 간다. 낮에는 많이 가봤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는 처음이다. 

 

 

 

 

도쿄 타워는 음. 생각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1999년작, '오버타임( オーバー・タイム). 개인적이지만, 지금 봐도 매우 멋진 어른들의 드라마. 세기말 감성 보다는 30대의 연애 감정이 가슴팍에 아른거렸던 드라마. 주인공 나츠키와 카에데의 친구 같은 연인, 연인 같았던 친구라는 관계가 현실적이어서 좋았던 드라마. 도쿄 타워가 보이는 서로의 방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Spitz의 '楓'를 들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은 몇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던 기억이 도쿄 타워를 보니 떠오른다. 

 

 

 

추억으로만 가득찬,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이 끝났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23.09.23.

 

아키하바라에서의 아쉬움과 씁쓸함을 뒤로 하고,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었던 닛포리로 향한다. 몇달 전에 보았던  「남은 인생 10년(余命10年)」 (영화 리뷰는 여기로)에서 주인공 커플이 해질 때 손잡고 거닐 던 야나카 긴자를 가보고 싶어서였다. 아키하바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생각해보는데, 이곳에서 우에노 방향으로 가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거의 츄오-소부 완행선을 타고 신주쿠로 돌아가거나, 야마노테선을 타더라도 반대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우에노, 닛포리, 스가모 등 지역은 2000년에 처음 도쿄에 왔었을 때, 가보고 안가봤기에 23년만에 가보게 된다. 

 

 

 

닛포리에 도착, 야나카 긴자로 쉬엄쉬엄 걸어가야지. 오전 내내 회색 구름으로만 가득했던 하늘이 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휘날리며, 닛포리에 온걸 환영해. 너에게 가장 멋진 하늘을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여기 골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골목마다 고개를 쏙 내밀고 탐색해본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러.브.호.텔.' 푸하하하하. 호텔 이름이 '愛'다. 쉽게 눈에 띄는 매우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네이밍이다. 건물 자체도 작아서 과연 영업이 될까 호기심이 들면서도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방음은 잘 되어 있을려나, 보이지는 않을려나 등등 별의 별 상상이 떠오른다. 그런데, 다른건 다 알겠는데 서비스 타임이란 의미가 무엇일지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일웹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하더라. 

 

  • 휴식 : 시간이 정해져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대실과 비슷한 의미. 
  • 서비스 타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대실과 비슷하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의미. 
    (예: 서비스 타임이 오전 6시부터 저녁 8시까지라면 휴식 시간과 동일한 가격에 해당 시간에 머무를 수 있음

 

 

 

러브호텔을 뒤로하고 다시 큰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니, 낯익은 거리와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 주인공 커플이 두 손을 잡고 석양을 바라보며 데이트 하던 길거리, 두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계단이다. 전혀 예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장소를 한번에 발견하다니. 반가울 따름이다. 

 

 

 

어떤 작가의 에세이에서 야나카 긴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을 놓고 싶을 정도로 최하까지 떨어진 상태, 무작정 길을 걸어 야나카 긴자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바라본 일몰이 정말로 아름다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오다보니,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아마 그때부터 야나카 긴자가 어떤 곳인지 매우 궁금했었다.  특히, 야나카 긴자 상점 거리를 앞에 두고 있는 「유야케 단단」 (夕やけだんだん) 이라 불리는 계단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도쿄타워, 스카이트리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해서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었지만, 닛포리에 도착한 하늘은 다시 구름으로 가득. 하지만, 지난 3일 내내 보이지 않았던 햇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심 기뻤다. 적어도 석양을 살짝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유야케 단단 근처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 사이로 때로는 석양이 환하게 보이다가 다시 구름속으로 숨었다가를 반복한다. 완벽한 오렌지색의 석양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빛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쏟아진다. 도쿄타워에서, 스카이트리에서 바라 본 석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석양을 바라보니 기분이 색다르다. 야나카 긴자에 온 것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이다. 완벽한 오렌지색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또 다시 오면 되니까. 

 

 

 

 

토끼처럼 「유야케 단단」 계단을 총총 걸어서 내려간다. 야나카 긴자 상점 거리를 가야지. 지난 몇 년 동안 도쿄의 동쪽 지역, 동쪽 도쿄라 불리는 다이토구, 스미다구, 분쿄구, 아다치구 등이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우에노, 아사쿠사, 오시아게, 아메요코 상점 거리 이외에도 스가모, 야나센, 닛포리 등 관광객이 가지 않을 듯한 지역들에도 관광객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다고 한다. 서쪽 도쿄로 대표되는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등 지역이 세련됨, 트렌디, 도회적이라는 키워드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동쪽 도쿄라 불리는 우에노, 닛포리, 스가모 등은 촌스러움, 시골스러움이라는 단어로 매력을 듬뿍 뽐내는 느낌이다. 

 

<신주쿠 및 이케부쿠로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들> 

 

<우에노 및 야나카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들> 

 

 

에도 시대부터 사찰과 서민적인 상가들로 가득했던 '야나카', 나츠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등 문인 작가들이 많이 살았던 '센다기', 그리고 1900년의 역사를 지난 빨간 도리이가 매력적인 네즈 신사가 있는 '네즈'. 3곳 거리의 이름을 따서 '야네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때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사찰과 무덤 밖에 없는 낡은 거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애정을 가진 3명의 주부가 복고풍의 거리 풍경과 유서 깊은 신사와 절, 축제와 사람 사는 냄새를 소개하는 일본 최초의 지역 잡지 『야나카·네즈·센다기(谷中・根津・千駄木)』을 창간했고 잡지의 매력이 퍼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도쿄를 대표하는 산책 명소가 되었다. 

 

사람이 2명 정도 서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상점 거리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가게들이 쉽게 눈에 들온다. 다이쇼 11년(1922년)에 설립된 전통 과자점 '고토노아메(後藤の飴)', 멘치카츠로 유명한 '니쿠노스즈키(肉のすずき)' 등 쉽게 볼 수 없는 개인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를 느긋하게 걷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대단한 것을 파는 것도 특별한 것 보는 것도 아니지만, 느긋하게 걸으면서 이것저것 사먹는 소박한 즐거움이 도쿄 여행의 매력을 다가온다. 

 

 

 

 

 

 

 

자, 이제 어린 시절의 영웅을 만나러 가야지. 

2023.09.23. 

 

게이오 고교 구경(관련글은 여기)을 마치고, 게이오 대학 구경을 한다. 게이오 대학은 세부적으로 보면 총 6개의 캠퍼스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미타 캠퍼스, 히요시 캠퍼스, 쇼난 후지사와 캠퍼스로 구분할 수 있다.

 

미타 캠퍼스가 대학본부, 고학년 중심의 문과 계열 및 로스쿨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히요시 캠퍼스는 일부 학과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학과의 1~2학년생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입학과 졸업 행사가 열리는, 게이오의 시작과 끝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다. 히요시 캠퍼스 중앙에는 2020년, 새로 만들어진 기념관 홀이 있다. 1958년 건립된 기존 건물은 수용 인원의 한계, 그리고 워낙 낡아 꾸준한 리모델링 요청이 있어왔고 아예 건물을 헐고 새롭게 만들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이렇게 새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예전 기념관홀을 보면 정말 이게 학교 건물이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상한 외관이라 차라리 이렇게 현대식으로 바꾼게 훨씬 깔끔하고 나아보인다 (옛 건물 외관).

 

게이오 대학 구경을 하면서 다음 여행을 가게 된다면, 시간이 허용한다면 현지 대학교 구경을 하러 다녀야지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단한 이유라기 보다는 나중에 아이가 본격적으로 공부를 할 때, 유명 대학 등을 보여주면서 보다 공부에 확고한 목표를 가지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사와 박사를 해외에서 하고 싶었던 나의 개인적인 욕망도 있어서 현지 대학을 구경하면 마치 학교를 다녔던 느낌일 받기에 다음부터는 그렇게 해볼까 싶다. 

 

 

게이오 대학 구경을 마치고 다음 장소인 아키하바라로 향한다. 그전에 도쿄역을 잠시 들려야지. 생각해보니 도쿄역까지는 메구로선을 타고 바로 갈 수 있지만 히비야역에서 내려 걷는게 귀찮아서 (이미 게이오 고교 구경하면서 많이 걸어서 아침부터 지친 상태), 무사시코스기역에서 한번 환승하면 도쿄역까지는 한번에 갈 수 있다는게 더 나을거 같아 그렇게 가기로 결정했다. JR 요코스카선을 타면 도쿄역까지는 단 3정거장. 시간상 비슷하지만 도큐 메구로선을 타는 것보다 정차역이 많이 줄어들어서 조금 편하게 가는게 더 이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간과하지 못한게 하나 있었으니 환승 거리였다. 무사시코스기역은 하나이지만 도큐 토요코선과 JR 요코스카선은 별개의 플랫폼을 사용하고 있어 양쪽으로 환승시에는 엄청난 거리를 걸어야 한다. 도보로는 10분 거리라고 나와 있지만, 나에게는 절대로 10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20분 정도?라고 해야하나. 그것도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다보니 더더욱 거리가 길게만 느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도큐 메구로선을 타고 갔어야 했나,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다. 

 

 

 

하지만 JR 요코스카선을 탄다면 좋은 점은 도카이도 신칸센을 최소 1회 이상은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사시코스키역의 JR 요코스카선이 도카이도 신칸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어 열차를 기다리다 보면 도쿄 또는 시나가와행 또는 신오카사카행 열차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다. 이미 몸은 기진맥진한 상태였지만 신칸센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만큼은 좋았다. 당장이라도 신칸센을 타고 어디라도 가면 좋을텐데. 한때 에반게리온 신칸센을 운영할 때, 신오카사에서 하카타까지 산요 신칸센을 타본적 있지만, 도카이도 신칸센(도쿄 - 오사카)은 아직이기에 신칸센을 보면서 제발 한번 탈 수 있는 기회를 바라는 간절한 소원을 빌었다. 

 

YOASOBI의 나고야 콘서트를 응모했기에, 만약 당첨이 된다면 콘서트 참석 이동 계획은 다음처럼 이동하기 않을까 싶다. 이렇게만 된다면 도쿄역에서 신오사카역까지 신칸센으로 이동할 수 있어 도쿄역에서 하카타역까지 전부 신칸센으로 이동한 경험을 쌓게 되는 것이다. 

 

이동 계획 : 김포 국제공항 → 하네다 → 도쿄역 → 나고야역(1박) → 신오사카역 → 간사이 국제공항

 

 

 

JR 요코스카선을 타고 도쿄역까지 잠들어버렸다. 게이오대와 게이오 고교를 둘러본게 전부 다인데 지쳐버리다니. 다른 건 둘째치고 발목이 너무나도 아픈게 여행의 어려움이 되는 것 같다. 최근부터는 오랜 시간 걸어다니는게 단순히 힘든것을 벗어나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까지 되어버렸다.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도 일부 영향이 있겠지만, 평발이라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 않나 추측해본다. 그나마 체력이 있던 20대 시절에는 하루 종일 걸어다녀도 살짝 피곤만 할 뿐,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걸 보면 한번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봐야겠다는 생각이 점차 커지고 있다. 

 

도쿄역에 도착했다. 아키하바라로 바로 이동할 생각도 있었지만 잠시 도쿄역을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쿄의 현관이라 불리는 도쿄역은 도카이도 신칸센과 도호쿠 신칸센의 기점이자, 재래선인 도카이도 본선과 도호쿠 본선의 시발역 역할을 하고 있다. 일평균 승차량 또는 일일 발착 열차 수로는 다른 역(신주쿠역, 우메다역 등) 비교하면 낮은 규모이지만, 여러 관점에서 보면 일본 철도의 살아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겠다. 

 

도쿄역 주변은 최근 2-3년간 일본에 불어닥친 부동산 열풍을 반영하든 신축 또는 리모델링이 완료된 건물이 많이 보인다. 부동산 열풍은 단순히 도쿄역 일대만 그런 것이 아닌 시부야, 긴자, 신바시, 시나가와 등 핵심 부도심 일대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코로나 이후 일시적인 반등의 결과일까 아니면 본격적인 경기 회복의 신호탄이지는 아직 그 누구도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러한 부동산 붐이 과연 일본 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많이 궁금할 따름이다. 

 

 

도카이도 신칸센의 다이어를 보면 저런 스케줄로 운영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촘촘한 스케줄이다. 최소 3분에서 최대 9분 사이의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배차 간격을 두고 있다. 등급 구분, 정차역 제한 등으로 미친듯한 다이어가 돌아가는 역량을 가진 JR 도카이에 더욱 놀라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능력을 바탕으로 전체 JR 회사 중에 가장 높은 영업이익을 내고 있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정부 지원 없이도 회사 단독으로 시나가와역에서 신오사카역까지 고속 자기부상 노선을 건설하고 있다는 것에 더더욱 놀라울 따름이다.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13시 39분부터 14시 49분까지 약 1시간 동안 21편의 열차가 도쿄역에서 출발한다(특별 편성 포함). 21편의 열차 중에서 17편이 최고 등급인 노조미, 2편이 중간 등급인 히카리, 그리고 나머지 2편이 최저 등급인 코다마. 

 

  • 노조미: 신오사카역까지 정차역은 시나가와역, 신요코하마역, 나고야역, 교토역까지 총 4개로 고정. 
  • 히카리: 매시 3분과 33분에 출발. 정차역은 노조미가 정차하는 역을 기본으로 시즈오카역과 하마마츠역에 정차하는 패턴, 기후하시마역과 마이바라역에 정차하는 패턴으로 구분. 차이는 나고야역 전후 정차 여부.
  • 코다마: 신오카사역까지 모든 역 정차. 

이와 같은 기본 구조로 편성을 설정함에 따라 히카리가 정차하는 동안 노조미를 1~2편 먼저 보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만들어지는 동시에 30분 배차 차이가 있는 히카리는 몇 분 차이를 두고 신오사카에 도착하는 규격화를 이루어졌다. 그렇기에 만약 인명사고 등이 발생하는 경우, 결국에는 이 모든 다이어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러한 다이어를 느껴보기 위해 도카이도 신칸센을 더더욱 타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든다. 그렇기에 제발, YOASOBI 나고야 콘서트 당첨되기를! 

 

 

짤막한 도쿄역 구경을 마치고 아키하바라로 향한다. 지난 3월에 왔을 때 사지 못했던 피규어가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채. 예전에는 아키하바라를 일정의 가장 최우선 순위로 두었을 뿐더러 최소 2번은 왔었을텐데 이번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최우선으로 오기는 커녕,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잠시 들리는 수준? 정도였다. 그것도 1시간 내외로 보고 마무리하자라는 계획까지도 세웠다. 

 

아직까지도 몸과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덕후이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거 같다. 예전 같았으면 무조건 뭐라도 사야해라는 강박관념으로 대형 샵부터 조그마한 샵까지 뒤졌는데, 지금은 몇 군데 돌아다니고 (대충 위치를 아니까), 없으면 다음에 오면 되겠지라는 마음이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다. 한때 유키 미쿠에 미쳤었을 땐 (지금도 여전하지만), 왠만한 샵은 다 뒤졌는데, 지금은 아마존이나 라쿠텐에서 직구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정확히 3군데 (리버티, 스루가야, 트레이더)만 들어갔고, 트레이더에서 지난 번에 구경조차 못했던 라이자 피규어를 손에 넣었다. 후후. (31,000엔 주고 샀다)

 

 

관심이 많이 줄어든 이유로는 아무래도 아키하바라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도 한몫을 하는 듯 싶다. 코로나 이전에는 덕후질을 할 수 있는 샵들이 많아 원하는 취향에 따라 돌아다니고 구경하는 재미가 컸었다. 이러한 다양성이 덕후질을 보다 촉진하고 즐겁게 만드는, 즉 말하자면 덕후들이 핵심 소비층으로 있으면서 라이트한 사람들이 모이는 형태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를 경험하며 수많은 규모에 상관 없이 희귀한 상품을 취급하였던 중고 상점들이 폐업을 하고 사라지면서 핵심 소비층이었던 덕후들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라이트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대신을 하면서, 특히 중국(또는 대만, 홍콩 등) 중고물품 판매상들이 그 자리를 많이 대체하며 그나마 남아있는 상품들마저도 싹스리하는 수준까지 와버렸다. 

 

결론적으로는, 코로나 이전에 갔었던 아키하바라는 다양하고, 독특하고, 새롭고, 구경거리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아키하바라는 타겟 대상을 확장하는데는 성공하였지만, 오타쿠의 문화가 많이 사라져버리고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을 강하게 느끼며 씁쓸함이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도 다음에 도쿄에 가면 나는 분명 아키하바라를 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무엇을 살까 고민하겠지만, 예전만큼은 아닐 거 같다는 느낌부터 드니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만이 크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아키하바라에 머물렀던 시간은 정확히 1시간 10분 밖에 되지 않았다.  

2023.09.22 

 

긴자에서 돌아와 숙소에 잠시 들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일정의 중심인 쵸후시의 중심지 쵸후역로 향한다. 도쿄도에 있으나 도쿄 23구에는 속하지 않는 행정 구역, 타마 지구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서울과 인접한 광명시, 과천시, 안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쵸후역까지는 신주쿠역까지는 케이오선을 타고 20분 내외 정도. 여행이든 출장이든 수십번 도쿄를 왔지만, 도쿄를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쵸후로 가는 이유는, 대학원때 함께 GSA를 했었던 앨리샤가 여기서 살고 있어 만나기 위해, 그리고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무대 탐방을 하기 위해서다. 

 

 

신주쿠 서부 지역의 철도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 일본의 16개 대형 사철 중 하나인 케이오 전철. 우스갯소리로 케이오 전철이 멈추면 타마 지역, 특히 쵸후시, 후추시, 히노시에 사는 사람들의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케이오 전철이 멈출리는 없으니 (극단적인 다이어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런 걱정은 살짝 내려 놓자. 

 

앨리샤와의 약속까지는 아직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오늘 가보고자 했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花束みたいな恋をした)」 촬영지 중 한 곳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신주쿠역에서 케이오선을 타고 치토세가라스마역에서 내린다. 서쪽으로 갈수록, 신주쿠역에서 멀어질수록 화려한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수수한 저층 건물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인듯 싶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간 곳은 슈퍼마켓. 성환이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폴리탄 이야기가 나왔는데 슈퍼마켓에 가면 나폴리탄 소스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눈에 보이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니 나폴리탄 소스가 눈에 보인다. 드디어 소스를 구하다니! 이제 한국 가서도 나폴리탄의 맛을 그대로 느껴봐야지. 

 

 

현지 사람들의 사는 동네를 본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큰 특권인 듯 싶다. 아시아, 중동, 남미 등 배낭여행을 할 때 여러 좋았던 모습들 중에 기억이 난다면,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거창히 말하자면 투어이고, 소박하게 말하자면 천천히 걸어다니기.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대형 바자르, 이란 야즈드의 이름 모를 올드 타운,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시내 거리 등 현지 사람들의 생활이 보여지는 곳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샌가 이들의 삶의 가운데에 들어가있는게 느껴진다.

 

주택가로 이루어진 동네를 걷고 있다보니 모든게 호기심투성이다. 집 구조는 어떨까, 어떤 가게가 있을까, 무엇을 하는 곳일까 등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만한 것들이 궁금함을 이끌어낸다. 항상 고층 건물로만 가득했던 사람들로만 가득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현지 사람들이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걸어다니니 마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느낌이라 여겨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아 봐와서 아주 익숙한 형태의 맨션이나 단독주택이 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빵집이 보이고, 목욕탕 같은 건물도 있고, 이발소라 여겨지는 곳도 있고, 심지어 한국어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있고, 모든 것이 새롭고 관심을 일으킨다. 여기네 사람들의 삶도 내가 사는 곳의 삶과 큰 차이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같은, 정말 평범한 동네라서 나와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유독 놀라운 것은 생각 이상으로 동네가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역주변 번화가(그래봤자 버스 정류장, 마트가 있는 정도)를 제외하고 기괴할 정도로 소음이라 여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나라 같이 배달이 활성화 되어 있지만,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기반의 배달이 이루어지니 원천적으로 소음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오토바이 배달 행태를 보면 개선해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신호위반은 기본, 교통질서 위반, 불법 주정차, 무면허 운전 등 온갖 요소들이 신경 노이로제의 원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 이뤄져야 무서움을 알고 안할텐데 온정주의가 모든 것을 망치는 듯한 느낌이다. 할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첫번째 성지순례 장소인 빵집이 나타난다. 이름은 '기무라야(木村屋)'. 주인공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가 연애를 시작하고 달달한 시절을 보내는 초반에 야키소바빵을 사러 들리는 빵집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성지순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빈번하다고 들었다. 오늘로써 나도 그 인원 중 한명이 된다. 

 

빵집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촬영할 때와는 시간이 흘렀기에 세부적인 모습들은 살짝 변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화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늙으신 할머니 한 분만이 가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느낌상으로는 저분이 빵집 주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마치 빵을 사러온 것처럼 어떤 빵을 살까 짧게 고민하다 고로케 3개를 계산하였다. 3개에 350엔. 이 정도 가격이면 너무나도 혜자다. 계산을 마칠 쯤, 조심스럽게 문의를 드린다. 

 

"すいません。 お店の写真とらせていただいてもよろしいでしょうか?

" 楽に撮ってください。"

 

 

 

▶ 영화 '빵집 장면'

 

빵을 팔지만, 빵집 같지 않은 느낌. 한쪽 벽에는 각종 그림 액자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군것질용으로 보이는 과자와 음료가 있다. 아마, 엄마와 함께 오는 아이들 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 같다는 추측이 든다. 도심의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의 빵집과는 거리가 전혀 반대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예전 우리네와 비슷한 평범한 빵집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정감이 간다. 계산대 옆에는 남녀 주연 배우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친필 사인이 영화 포스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빵집이 등장한 시간은 고작 10초 내외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초반의 산뜻한 느낌을 표현하였던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배우들도 여기서 촬영이 즐거웠기에 이렇게 친필 사인까지 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소에 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친필 사인까지 보다니, 흥분의 도가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치토세가라스마역으로 돌아와 케이오선을 타고 쵸후역으로 간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남았으니, 계획대로 두번째와 세번째 성지순례를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램과는 달리, 쵸후역에 도착하니, 흐리기만 했던 구름은 어느새 폭우를 동반한 비 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카페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느껴 일단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걸리는 장소. 비만 안왔다면 걸어가면서 주변 구경도 하였을테지만, 이런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버스틀 타기로 했다.

 

아뿔싸, 비가 내리는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도로가 정체이다. 중심 도로까지 빠져나가는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세번째 성지순례는 못갈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만 있다. 6 정거장 뒤에 내려야 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소리에만 집중한다. 물론 마음은 비를 원망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해서 목적지까지 걷는다. 비가 내리는 것을 넘어서 퍼붓듯이 쏟아져 내린다. 하필 왜 비가 오는거야. 

 

퍼붓는 피를 뚫고 간신히 두번째 성지순례지인 오토자카 다리(御塔坂橋)에 도착했다. 이 곳에 와야했던 이유는 딱 하나,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가 이루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남녀는 이곳 횡단보도에서 역사적인 첫 키스를 하고 사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두 사람이 키스를 하였던 위치를 추정,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비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일단 한 손에는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있는데 바람이 불고 각도가 맞지 않는 등 사진 찍기가 영 쉽지 않다. 여차저차해서 사진을 찍긴 하였지만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등 제대로 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날씨 상태가 계속 안좋아져서 이대로는 세번째 성지순례 예정지인 남녀 주인공이 동거를 시작한 집이 있는 타마가와라 다리(多摩川原橋)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간다. 

 

※ 그날 숙소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곳은 오토자가 다리 남쪽 횡단보도였다. 북쪽 횡단보도에서 키스를 한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남쪽 횡단보도와는 고작 50m 정도 차이였는데.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지 않았던 나의 큰 실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아. 

 

 

▶ 영화 '첫 키스 횡단보도 장면'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오니 5시 50분. 앨리샤가 퇴근을 하고 쵸후역으로 오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거 같다는 연락을 주어서 근처 New York이라 상호명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산을 썼는데도 생각보다 비에 많이 젖어 추위를 느꼈는데 따뜻한 라떼를 마시니 몸이 살짝 녹는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앨리샤가 카페에 들어오는게 보인다. 지난 3월에는 신주쿠에서 만났는데, 그때 쵸후로 가겠다고 약속을 해서 이곳에서 만난다. 6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소중한 인연.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 쵸후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너무나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앨리샤한테 말한다. 앨리샤도 쵸후 자랑을 하면서 이곳저곳에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다음에도 꼭 오라고. 맥주 한잔을 곁을여 6개월단의 서로의 근황을 먼저 물어본다. 앨리샤는 여전히 옛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요리를 잘 못하니 남편이 요리를 만드는 것도 고려했었다고. 서로의 이야기 이외에도 일본에 오기전부터 궁금했던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대학원 사람들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도 공유하며 15년전의 추억에 잠겼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시간은 9시 30분.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쵸후에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앨리샤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쵸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앨리샤도 다음에는 더 좋은 장소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하며 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6개월만의 만남은 3시간으로 끝났지만, 좋은 인연을 먼 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알찬 시간이었다. 

 

 

케이오선을 타고 다시 신주쿠역으로. 앨리샤를 만난 즐거움이 가득하였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세번째 성지순례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컸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후보로만 생각해둔 장소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신주쿠역과 가까운 메이다이메이역에서 내려, 성지순례 장소로 향한다. 막차를 타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인 열차역과 결국 막차를 놓쳐 24시간 카페로 향하면서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다. 

 

▶ 영화: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 장면'

 

 

 

▶ 영화: '막차를 타기 위해 메이다이메이역 앞에서 부딪혀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장면'

 

메이다이메이역은 메이지대학의 이즈미 캠퍼스가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비오는 금요일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역은 매우 혼잡하다. 메이다이메이역의 일평균 이용객 수가 17만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환승역인 것을 감안하여도 높은 수치다. 역시 대학생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역 근처 술집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하는 대학생들, 직장인들, 또는 일반인들인가 보다. 

 

 

성지순례를 마지고 10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비만 내렸을 뿐인데 몇일간 고된 고생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뭔가 이대로 씻고 잠들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좋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느낌? 그래서 간단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고 우연히 발견한 뮤직 바를 방문한다. 

 

일본은 건물 안 또는 상가 내부에 진주처럼 숨어있는 바가 꽤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겉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련된 음악과 무거운 온도감의 조명의 분위기로 둘러쌓인 스타일의 바가 있다. 어둑한 느낌이 딱 좋다. 테이블도 많지 않고 아늑한 공간에서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과 한잔 즐기는 느낌이다. 

 

신주쿠에 있는 바 치고는 술 값이 싼 편이지만 커버차지가 별도로 700엔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가격이다. 한쪽 벽면에는 최근 핫한 음반들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  「First Love 初恋」 드라마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우타다 히카루의 한정 LP도 눈에 보인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는 히비키가 900엔으로 저렴하길래 주문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신청해서 감상한다. 

 

 

뮤직 바에서 나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싫어 호텔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걷는다.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아쉬움. 비만 아니었다면 다 좋았을텐데. 그러면서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질문에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도 아닌, 무엇을 보느냐도 아닌, 날씨라는 것. 

 

 

비 안개로 뒤덮은 초록색의 도코모 타워만이 밤을 강하게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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