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3.

 

아키하바라에서의 아쉬움과 씁쓸함을 뒤로 하고, 이번 여행에서 꼭 가고 싶었던 닛포리로 향한다. 몇달 전에 보았던  「남은 인생 10년(余命10年)」 (영화 리뷰는 여기로)에서 주인공 커플이 해질 때 손잡고 거닐 던 야나카 긴자를 가보고 싶어서였다. 아키하바라에서 열차를 기다리며 생각해보는데, 이곳에서 우에노 방향으로 가본적이 한번도 없었다. 거의 츄오-소부 완행선을 타고 신주쿠로 돌아가거나, 야마노테선을 타더라도 반대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우에노, 닛포리, 스가모 등 지역은 2000년에 처음 도쿄에 왔었을 때, 가보고 안가봤기에 23년만에 가보게 된다. 

 

 

 

닛포리에 도착, 야나카 긴자로 쉬엄쉬엄 걸어가야지. 오전 내내 회색 구름으로만 가득했던 하늘이 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구름 사이로 햇빛이 휘날리며, 닛포리에 온걸 환영해. 너에게 가장 멋진 하늘을 보여줄게라고 말하는 듯 싶었다. 여기 골목에는 무엇이 있을까, 골목마다 고개를 쏙 내밀고 탐색해본다. 그러다가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다. 바로 '러.브.호.텔.' 푸하하하하. 호텔 이름이 '愛'다. 쉽게 눈에 띄는 매우 직관적이고 매력적인 네이밍이다. 건물 자체도 작아서 과연 영업이 될까 호기심이 들면서도 주택가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방음은 잘 되어 있을려나, 보이지는 않을려나 등등 별의 별 상상이 떠오른다. 그런데, 다른건 다 알겠는데 서비스 타임이란 의미가 무엇일지 매우 궁금했다. 그래서 일웹을 뒤져보니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하더라. 

 

  • 휴식 : 시간이 정해져 있는, 우리나라로 치면 대실과 비슷한 의미. 
  • 서비스 타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대실과 비슷하지만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는 의미. 
    (예: 서비스 타임이 오전 6시부터 저녁 8시까지라면 휴식 시간과 동일한 가격에 해당 시간에 머무를 수 있음

 

 

 

러브호텔을 뒤로하고 다시 큰 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어가니, 낯익은 거리와 계단이 눈에 들어온다. 영화에서 주인공 커플이 두 손을 잡고 석양을 바라보며 데이트 하던 길거리, 두 사람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계단이다. 전혀 예상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장소를 한번에 발견하다니. 반가울 따름이다. 

 

 

 

어떤 작가의 에세이에서 야나카 긴자를 이렇게 표현했다. 인생을 놓고 싶을 정도로 최하까지 떨어진 상태, 무작정 길을 걸어 야나카 긴자에 도착했는데 거기서 바라본 일몰이 정말로 아름다워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계속 오다보니,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고. 아마 그때부터 야나카 긴자가 어떤 곳인지 매우 궁금했었다.  특히, 야나카 긴자 상점 거리를 앞에 두고 있는 「유야케 단단」 (夕やけだんだん) 이라 불리는 계단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도쿄타워, 스카이트리의 그것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고 해서 꼭 가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었지만, 닛포리에 도착한 하늘은 다시 구름으로 가득. 하지만, 지난 3일 내내 보이지 않았던 햇빛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심 기뻤다. 적어도 석양을 살짝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까. 유야케 단단 근처에서 얼마나 있었을까. 시시각각 변화하는 구름 사이로 때로는 석양이 환하게 보이다가 다시 구름속으로 숨었다가를 반복한다. 완벽한 오렌지색의 석양을 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빛과 구름이 만들어내는 장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쏟아진다. 도쿄타워에서, 스카이트리에서 바라 본 석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석양을 바라보니 기분이 색다르다. 야나카 긴자에 온 것이 후회되지 않을 정도이다. 완벽한 오렌지색을 경험하지는 못했지만,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또 다시 오면 되니까. 

 

 

 

 

토끼처럼 「유야케 단단」 계단을 총총 걸어서 내려간다. 야나카 긴자 상점 거리를 가야지. 지난 몇 년 동안 도쿄의 동쪽 지역, 동쪽 도쿄라 불리는 다이토구, 스미다구, 분쿄구, 아다치구 등이 관광지로 급부상하고 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우에노, 아사쿠사, 오시아게, 아메요코 상점 거리 이외에도 스가모, 야나센, 닛포리 등 관광객이 가지 않을 듯한 지역들에도 관광객의 유입이 크게 증가하였다고 한다. 서쪽 도쿄로 대표되는 신주쿠, 시부야, 이케부쿠로 등 지역이 세련됨, 트렌디, 도회적이라는 키워드로 사람들을 이끈다면, 동쪽 도쿄라 불리는 우에노, 닛포리, 스가모 등은 촌스러움, 시골스러움이라는 단어로 매력을 듬뿍 뽐내는 느낌이다. 

 

<신주쿠 및 이케부쿠로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들> 

 

<우에노 및 야나카에서 자주 보이는 사람들> 

 

 

에도 시대부터 사찰과 서민적인 상가들로 가득했던 '야나카', 나츠메 소세키, 모리 오가이 등 문인 작가들이 많이 살았던 '센다기', 그리고 1900년의 역사를 지난 빨간 도리이가 매력적인 네즈 신사가 있는 '네즈'. 3곳 거리의 이름을 따서 '야네센'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때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사찰과 무덤 밖에 없는 낡은 거리'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애정을 가진 3명의 주부가 복고풍의 거리 풍경과 유서 깊은 신사와 절, 축제와 사람 사는 냄새를 소개하는 일본 최초의 지역 잡지 『야나카·네즈·센다기(谷中・根津・千駄木)』을 창간했고 잡지의 매력이 퍼져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도쿄를 대표하는 산책 명소가 되었다. 

 

사람이 2명 정도 서로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상점 거리에는 한눈에 봐도 오래된 가게들이 쉽게 눈에 들온다. 다이쇼 11년(1922년)에 설립된 전통 과자점 '고토노아메(後藤の飴)', 멘치카츠로 유명한 '니쿠노스즈키(肉のすずき)' 등 쉽게 볼 수 없는 개인 상점들로 가득한 거리를 느긋하게 걷다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대단한 것을 파는 것도 특별한 것 보는 것도 아니지만, 느긋하게 걸으면서 이것저것 사먹는 소박한 즐거움이 도쿄 여행의 매력을 다가온다. 

 

 

 

 

 

 

 

자, 이제 어린 시절의 영웅을 만나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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