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23.

 

 

야나카 긴자 구경을 즐겁게 마무리 했으니,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로 이동한다. 목적지는 카미샤쿠이역. 이곳에 가는 목적은 단 하나다. 나에게 아주 특별한 라면을 먹기 위해서. 이번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도쿄보다 도쿄 주변을 많이 구경하고 있다. 마쿠하리, 초후, 히요시,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카미샤쿠지이까지. 정신 없이 돌아다니고 있지만 마지막까지 열심히 다녀야지. 

 

 

 

니시닛포리역에서 카미샤쿠지이역까지는 50분 정도? 이케부쿠로역에서 갈아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타카다노바바역에서 갈아타는거 이동 거리를 잠시나마 줄일 수 있을거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가기로 했다. 타카다노바바역은 일본 전체 전철역 승하차량에서 전체 1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일단, 도쿄 서부 지역 직장인들의 출퇴근을 맡고 있는 세이부 신주쿠선이 지나가고 (세이부 신주쿠역이 종점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이곳에서 하차하는 편이다), 게이오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와세다 대학(정확히는 니시 캠퍼스), 가큐슈인 대학, 가쿠슈인 여대 등 주요 대학교가 몰려 있다보니 사람들로 매번 붐빌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다만, 야마노테선과 세이부 신주쿠선의 환승은 개념 환승의 정석이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쉬운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은 매우 마음에 든다. 시간이 되면 와세다 대학 구경도 하고 싶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다음에 방문하자. 

 

 

 

 

세이부 신주쿠선을 타고 얼마나 갔을려나, 드디어 카이샤쿠지이역에 도착했다. 5분만 걸어가면 아주 특별한 라멘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떨린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무도 모를거다. 코로나 이전에는 출장 때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고, 지난 3월에 왔었을 때는 가게가 쉬는 날이라 아쉬움을 머금고 돌아서야만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조건 가야겠다는 의지가 강했고, 여기까지 왔다. 

 

드디어 가게에 도착했다. 저녁 영업이 시작하기까지는 10분 정도 남았다. 브레이크 타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내 앞에는 벌써 2명의 대기자가 줄을 서서 가게가 오픈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이분들도 나처럼 특별한 라멘을 먹으로 오셨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옷차림을 보니 일부러 여기까지 온 사람은 아닌거 같고 동네 주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어느새 가게 문이 열렸다. 심호흡을 깊게 하고 가게로 들어간다. 오랜 시간, 이 순간이 오기를 학수고대만 했는데 드디어 실현이 되는거 같아 거대한 기대감과 기쁨만이 가득한다. 

 

 

 

 

키오스크에서 라멘과 교자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처음 오는 곳이지만 분위기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꿈이 이루어져서 그런가, 흥분만이 나에겐 가득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라멘과 교자가 나왔다. 얼핏 평범하게 보이는, 어디에서나 판매하는 그런 라면과 교자처럼 보이겠지만 절대로 그렇지가 않다. 특별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이렇게 평범한 라멘과 교자에 나는 왜 집착아닌 집착을 보였을까. 그 이유는 바로. 

 

『'빛의 전사 마스크맨 (일본명: 光戦隊 マスクマン)』

 

여기에 온 이유는 '빛의 전사 마스크맨' 때문이었다. 초딩 때 본 걸로 기억하는데 (아니면 입학전에) 비디오 가게에 가면 항상 후뢰시맨, 바이오맨과 함께 3대 전대물로 불렸던 '빛의 전사 마스크맨'의 레드 마스크가 배우 은퇴를 하고 운영하는 라멘 가게라 시간을 내서라도 오고 싶었다. 팬이라면, 그것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다면 당연히 와야하는게 인지상정이 아닐까. 1987년 2월에 첫 방영을 했으니 3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스토리가 선명하게 기억나고 오프닝은 아직도 쉽게 따라 부를 정도로 여전히 잊혀지지 않는 80-90년대의 황금 시절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엔 미지의 힘이 숨겨져있다. 단련시키면 시킬수록, 무한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 빛의 전사 마스크맨 '한국판 오프닝'

 

 

▶ 빛의 전사 마스크맨 '일본판 오프닝'

 

 

레드 마스크 역을 맡으셨던, 마스크맨의 주인공은 사장님(본명 이나바 가즈노리)은 지금은 나이가 많이 드셨지만, 아직도 얼굴에서는 옛 모습이 많이 보인다. 레드 마스크로 활약하던  그 시절을 보면 잘생김 그 자체라고 느껴질 정도로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사람은 잘 생겨야 한다. 남자라면 잘생겨야 한다. 

 

혹시나 사진을 찍는게 가능할까 싶어 정중히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여쭤보았는데 안된다고 거절을 하셨다. 아무래도 나 같은 덕후들이 많다보니 매번 이렇게 사진을 찍자는 요구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고, 영업 중인데 다른 손님께 폐를 끼친다고 느껴질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너무나도 아쉬워서 요리하시는 뒷모습이라도 찍었다. 고마워요 레드 마스크ㅠㅠ 

 

 

 

레드 마스크 이후 몇 번의 작품을 하셨지만 이후 완전히 배우 일을 그만 두시고 이곳에서 라멘 가게를 운영하시는데, 가게에는 여전히 마스크맨의 추억을 간직하고 싶었던 모양이시던지, 초상화를 비롯하여 각종 마스크맨 관련 굿즈들을 전시해두고 있으셨다. 사장님은 더더욱 그러시겠지만, 나도 전시되어 있는 각종 포스터, 굿즈 등을 보면서 마스크맨을 정말로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 소록소록 떠올랐다. 비디오 가게에 가면 마스크맨 최신편을 빌려서 집에서 몇번씩 돌려보고, 동네 친구들과 액션 포즈를 하면서 놀고, 비디오 가게에 가서 언제 다음편 나오는지 물어보고. 그리고 최신편이 나오면 엄마한테 돈 받아서 최신편을 빌리러 가고.그리고 레드 마스크를 보면서 나도 저렇게 멋지게 변신해서 지구를 지켜야지라고 상상도 했었고.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던 그 어린 시절이었다. 

 

지금 우리가 <해리포터> 1편을 추억하듯, 아재들이 <나홀로 집에>를 추억하듯. 여기서 중요한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닙니다. 솔직히 <나홀로 집에>. 이거 잘 만든 영화 아니거든요. <해리포터> 1편? 시작적으로는 훌륭하긴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논하기는 아쉽습니다.

중요한 건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라 니가 그때 10살이었다는 거죠.

- 부기영화, 범블비 리뷰 중. 

 

 

라멘을 다 먹고 추억에 쌓여 가게를 나오는데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사장님이 다시 가게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급히 달려가 악수를 청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한국에서 온 팬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저에게 있어 영웅이었습니다.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셔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렸더니 "감사합니다"라고 웃으시면서 대답을 해주셨다. 정말 기뻤다. 팬이라면 가장 행복하지 않을까. 한때 어렸을 때의 영웅을 이렇게 만나봤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에서 최고의 만족을 경험한 느낌이다. 

 

 

 

 

 

 

기쁨이라는 감정만을 마음에 가득 담아 다시 신주쿠역으로 돌아간다. 카미샤쿠지이역에서 개찰구를 지나가려고 하는데, 뭔가 낯읽은게 눈에 보여 잠시 다가가서 보았다. 그것은 오늘의 세이부 라이온즈 경기 결과표였다. 치바 롯데와의 경기에서 2-1로 세이부 라이온즈가 승리한 결과를 이렇게 역무실 앞에서 보여주고 있던 것이었다. 세이부 라이온즈의 모기업은 세이부 철도, 내가 타는 열차는 세이부 철도에서 운영하는 열차.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이부 라이온즈의 경기를 놓친 사람들에게도 역에서 내리거나 탈 때 보여주는게 예상외의 센스라고 느껴졌다. 인터넷으로 대부분 경기 결과를 확인하겠지만, 그렇지도 못한 사람들도 있을테니 이러한 배려 혹은 한번이라도 홍보를 하고자 하는 것이 느껴졌다. 

 

 

 

숙소에 도착해 짐 정리를 끝내고, 이대로 마무리 하기 끝내기가 싫어 어제 갔던 뮤직바를 다시 간다. 홋카이도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며  King Gun의 '白日'을 신청해 듣고 기분 좋은 마음을 여전히 유지한채 바를 나왔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택시를 잡고 도쿄 타워를 간다. 낮에는 많이 가봤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는 처음이다. 

 

 

 

 

도쿄 타워는 음. 생각나는 드라마가 하나 있는데 1999년작, '오버타임( オーバー・タイム). 개인적이지만, 지금 봐도 매우 멋진 어른들의 드라마. 세기말 감성 보다는 30대의 연애 감정이 가슴팍에 아른거렸던 드라마. 주인공 나츠키와 카에데의 친구 같은 연인, 연인 같았던 친구라는 관계가 현실적이어서 좋았던 드라마. 도쿄 타워가 보이는 서로의 방에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Spitz의 '楓'를 들으면서 전화 통화를 하는 장면은 몇번이나 반복해서 보았던 기억이 도쿄 타워를 보니 떠오른다. 

 

 

 

추억으로만 가득찬, 여름의 기운이 가시지 않은, 도쿄에서의 마지막 밤이 끝났다.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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