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2 

 

긴자에서 돌아와 숙소에 잠시 들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일정의 중심인 쵸후시의 중심지 쵸후역로 향한다. 도쿄도에 있으나 도쿄 23구에는 속하지 않는 행정 구역, 타마 지구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서울과 인접한 광명시, 과천시, 안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쵸후역까지는 신주쿠역까지는 케이오선을 타고 20분 내외 정도. 여행이든 출장이든 수십번 도쿄를 왔지만, 도쿄를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쵸후로 가는 이유는, 대학원때 함께 GSA를 했었던 앨리샤가 여기서 살고 있어 만나기 위해, 그리고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무대 탐방을 하기 위해서다. 

 

 

신주쿠 서부 지역의 철도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 일본의 16개 대형 사철 중 하나인 케이오 전철. 우스갯소리로 케이오 전철이 멈추면 타마 지역, 특히 쵸후시, 후추시, 히노시에 사는 사람들의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케이오 전철이 멈출리는 없으니 (극단적인 다이어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런 걱정은 살짝 내려 놓자. 

 

앨리샤와의 약속까지는 아직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오늘 가보고자 했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花束みたいな恋をした)」 촬영지 중 한 곳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신주쿠역에서 케이오선을 타고 치토세가라스마역에서 내린다. 서쪽으로 갈수록, 신주쿠역에서 멀어질수록 화려한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수수한 저층 건물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인듯 싶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간 곳은 슈퍼마켓. 성환이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폴리탄 이야기가 나왔는데 슈퍼마켓에 가면 나폴리탄 소스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눈에 보이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니 나폴리탄 소스가 눈에 보인다. 드디어 소스를 구하다니! 이제 한국 가서도 나폴리탄의 맛을 그대로 느껴봐야지. 

 

 

현지 사람들의 사는 동네를 본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큰 특권인 듯 싶다. 아시아, 중동, 남미 등 배낭여행을 할 때 여러 좋았던 모습들 중에 기억이 난다면,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거창히 말하자면 투어이고, 소박하게 말하자면 천천히 걸어다니기.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대형 바자르, 이란 야즈드의 이름 모를 올드 타운,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시내 거리 등 현지 사람들의 생활이 보여지는 곳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샌가 이들의 삶의 가운데에 들어가있는게 느껴진다.

 

주택가로 이루어진 동네를 걷고 있다보니 모든게 호기심투성이다. 집 구조는 어떨까, 어떤 가게가 있을까, 무엇을 하는 곳일까 등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만한 것들이 궁금함을 이끌어낸다. 항상 고층 건물로만 가득했던 사람들로만 가득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현지 사람들이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걸어다니니 마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느낌이라 여겨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아 봐와서 아주 익숙한 형태의 맨션이나 단독주택이 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빵집이 보이고, 목욕탕 같은 건물도 있고, 이발소라 여겨지는 곳도 있고, 심지어 한국어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있고, 모든 것이 새롭고 관심을 일으킨다. 여기네 사람들의 삶도 내가 사는 곳의 삶과 큰 차이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같은, 정말 평범한 동네라서 나와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유독 놀라운 것은 생각 이상으로 동네가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역주변 번화가(그래봤자 버스 정류장, 마트가 있는 정도)를 제외하고 기괴할 정도로 소음이라 여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나라 같이 배달이 활성화 되어 있지만,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기반의 배달이 이루어지니 원천적으로 소음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오토바이 배달 행태를 보면 개선해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신호위반은 기본, 교통질서 위반, 불법 주정차, 무면허 운전 등 온갖 요소들이 신경 노이로제의 원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 이뤄져야 무서움을 알고 안할텐데 온정주의가 모든 것을 망치는 듯한 느낌이다. 할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첫번째 성지순례 장소인 빵집이 나타난다. 이름은 '기무라야(木村屋)'. 주인공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가 연애를 시작하고 달달한 시절을 보내는 초반에 야키소바빵을 사러 들리는 빵집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성지순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빈번하다고 들었다. 오늘로써 나도 그 인원 중 한명이 된다. 

 

빵집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촬영할 때와는 시간이 흘렀기에 세부적인 모습들은 살짝 변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화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늙으신 할머니 한 분만이 가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느낌상으로는 저분이 빵집 주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마치 빵을 사러온 것처럼 어떤 빵을 살까 짧게 고민하다 고로케 3개를 계산하였다. 3개에 350엔. 이 정도 가격이면 너무나도 혜자다. 계산을 마칠 쯤, 조심스럽게 문의를 드린다. 

 

"すいません。 お店の写真とらせていただいてもよろしいでしょうか?

" 楽に撮ってください。"

 

 

 

▶ 영화 '빵집 장면'

 

빵을 팔지만, 빵집 같지 않은 느낌. 한쪽 벽에는 각종 그림 액자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군것질용으로 보이는 과자와 음료가 있다. 아마, 엄마와 함께 오는 아이들 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 같다는 추측이 든다. 도심의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의 빵집과는 거리가 전혀 반대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예전 우리네와 비슷한 평범한 빵집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정감이 간다. 계산대 옆에는 남녀 주연 배우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친필 사인이 영화 포스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빵집이 등장한 시간은 고작 10초 내외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초반의 산뜻한 느낌을 표현하였던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배우들도 여기서 촬영이 즐거웠기에 이렇게 친필 사인까지 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소에 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친필 사인까지 보다니, 흥분의 도가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치토세가라스마역으로 돌아와 케이오선을 타고 쵸후역으로 간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남았으니, 계획대로 두번째와 세번째 성지순례를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램과는 달리, 쵸후역에 도착하니, 흐리기만 했던 구름은 어느새 폭우를 동반한 비 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카페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느껴 일단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걸리는 장소. 비만 안왔다면 걸어가면서 주변 구경도 하였을테지만, 이런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버스틀 타기로 했다.

 

아뿔싸, 비가 내리는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도로가 정체이다. 중심 도로까지 빠져나가는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세번째 성지순례는 못갈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만 있다. 6 정거장 뒤에 내려야 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소리에만 집중한다. 물론 마음은 비를 원망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해서 목적지까지 걷는다. 비가 내리는 것을 넘어서 퍼붓듯이 쏟아져 내린다. 하필 왜 비가 오는거야. 

 

퍼붓는 피를 뚫고 간신히 두번째 성지순례지인 오토자카 다리(御塔坂橋)에 도착했다. 이 곳에 와야했던 이유는 딱 하나,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가 이루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남녀는 이곳 횡단보도에서 역사적인 첫 키스를 하고 사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두 사람이 키스를 하였던 위치를 추정,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비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일단 한 손에는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있는데 바람이 불고 각도가 맞지 않는 등 사진 찍기가 영 쉽지 않다. 여차저차해서 사진을 찍긴 하였지만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등 제대로 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날씨 상태가 계속 안좋아져서 이대로는 세번째 성지순례 예정지인 남녀 주인공이 동거를 시작한 집이 있는 타마가와라 다리(多摩川原橋)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간다. 

 

※ 그날 숙소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곳은 오토자가 다리 남쪽 횡단보도였다. 북쪽 횡단보도에서 키스를 한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남쪽 횡단보도와는 고작 50m 정도 차이였는데.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지 않았던 나의 큰 실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아. 

 

 

▶ 영화 '첫 키스 횡단보도 장면'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오니 5시 50분. 앨리샤가 퇴근을 하고 쵸후역으로 오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거 같다는 연락을 주어서 근처 New York이라 상호명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산을 썼는데도 생각보다 비에 많이 젖어 추위를 느꼈는데 따뜻한 라떼를 마시니 몸이 살짝 녹는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앨리샤가 카페에 들어오는게 보인다. 지난 3월에는 신주쿠에서 만났는데, 그때 쵸후로 가겠다고 약속을 해서 이곳에서 만난다. 6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소중한 인연.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 쵸후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너무나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앨리샤한테 말한다. 앨리샤도 쵸후 자랑을 하면서 이곳저곳에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다음에도 꼭 오라고. 맥주 한잔을 곁을여 6개월단의 서로의 근황을 먼저 물어본다. 앨리샤는 여전히 옛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요리를 잘 못하니 남편이 요리를 만드는 것도 고려했었다고. 서로의 이야기 이외에도 일본에 오기전부터 궁금했던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대학원 사람들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도 공유하며 15년전의 추억에 잠겼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시간은 9시 30분.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쵸후에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앨리샤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쵸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앨리샤도 다음에는 더 좋은 장소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하며 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6개월만의 만남은 3시간으로 끝났지만, 좋은 인연을 먼 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알찬 시간이었다. 

 

 

케이오선을 타고 다시 신주쿠역으로. 앨리샤를 만난 즐거움이 가득하였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세번째 성지순례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컸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후보로만 생각해둔 장소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신주쿠역과 가까운 메이다이메이역에서 내려, 성지순례 장소로 향한다. 막차를 타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인 열차역과 결국 막차를 놓쳐 24시간 카페로 향하면서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다. 

 

▶ 영화: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 장면'

 

 

 

▶ 영화: '막차를 타기 위해 메이다이메이역 앞에서 부딪혀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장면'

 

메이다이메이역은 메이지대학의 이즈미 캠퍼스가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비오는 금요일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역은 매우 혼잡하다. 메이다이메이역의 일평균 이용객 수가 17만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환승역인 것을 감안하여도 높은 수치다. 역시 대학생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역 근처 술집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하는 대학생들, 직장인들, 또는 일반인들인가 보다. 

 

 

성지순례를 마지고 10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비만 내렸을 뿐인데 몇일간 고된 고생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뭔가 이대로 씻고 잠들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좋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느낌? 그래서 간단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고 우연히 발견한 뮤직 바를 방문한다. 

 

일본은 건물 안 또는 상가 내부에 진주처럼 숨어있는 바가 꽤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겉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련된 음악과 무거운 온도감의 조명의 분위기로 둘러쌓인 스타일의 바가 있다. 어둑한 느낌이 딱 좋다. 테이블도 많지 않고 아늑한 공간에서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과 한잔 즐기는 느낌이다. 

 

신주쿠에 있는 바 치고는 술 값이 싼 편이지만 커버차지가 별도로 700엔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가격이다. 한쪽 벽면에는 최근 핫한 음반들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  「First Love 初恋」 드라마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우타다 히카루의 한정 LP도 눈에 보인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는 히비키가 900엔으로 저렴하길래 주문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신청해서 감상한다. 

 

 

뮤직 바에서 나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싫어 호텔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걷는다.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아쉬움. 비만 아니었다면 다 좋았을텐데. 그러면서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질문에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도 아닌, 무엇을 보느냐도 아닌, 날씨라는 것. 

 

 

비 안개로 뒤덮은 초록색의 도코모 타워만이 밤을 강하게 빛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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