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2 

 

긴자에서 돌아와 숙소에 잠시 들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일정의 중심인 쵸후시의 중심지 쵸후역로 향한다. 도쿄도에 있으나 도쿄 23구에는 속하지 않는 행정 구역, 타마 지구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서울과 인접한 광명시, 과천시, 안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쵸후역까지는 신주쿠역까지는 케이오선을 타고 20분 내외 정도. 여행이든 출장이든 수십번 도쿄를 왔지만, 도쿄를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쵸후로 가는 이유는, 대학원때 함께 GSA를 했었던 앨리샤가 여기서 살고 있어 만나기 위해, 그리고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무대 탐방을 하기 위해서다. 

 

 

신주쿠 서부 지역의 철도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 일본의 16개 대형 사철 중 하나인 케이오 전철. 우스갯소리로 케이오 전철이 멈추면 타마 지역, 특히 쵸후시, 후추시, 히노시에 사는 사람들의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케이오 전철이 멈출리는 없으니 (극단적인 다이어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런 걱정은 살짝 내려 놓자. 

 

앨리샤와의 약속까지는 아직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오늘 가보고자 했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花束みたいな恋をした)」 촬영지 중 한 곳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신주쿠역에서 케이오선을 타고 치토세가라스마역에서 내린다. 서쪽으로 갈수록, 신주쿠역에서 멀어질수록 화려한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수수한 저층 건물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인듯 싶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간 곳은 슈퍼마켓. 성환이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폴리탄 이야기가 나왔는데 슈퍼마켓에 가면 나폴리탄 소스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눈에 보이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니 나폴리탄 소스가 눈에 보인다. 드디어 소스를 구하다니! 이제 한국 가서도 나폴리탄의 맛을 그대로 느껴봐야지. 

 

 

현지 사람들의 사는 동네를 본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큰 특권인 듯 싶다. 아시아, 중동, 남미 등 배낭여행을 할 때 여러 좋았던 모습들 중에 기억이 난다면,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거창히 말하자면 투어이고, 소박하게 말하자면 천천히 걸어다니기.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대형 바자르, 이란 야즈드의 이름 모를 올드 타운,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시내 거리 등 현지 사람들의 생활이 보여지는 곳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샌가 이들의 삶의 가운데에 들어가있는게 느껴진다.

 

주택가로 이루어진 동네를 걷고 있다보니 모든게 호기심투성이다. 집 구조는 어떨까, 어떤 가게가 있을까, 무엇을 하는 곳일까 등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만한 것들이 궁금함을 이끌어낸다. 항상 고층 건물로만 가득했던 사람들로만 가득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현지 사람들이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걸어다니니 마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느낌이라 여겨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아 봐와서 아주 익숙한 형태의 맨션이나 단독주택이 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빵집이 보이고, 목욕탕 같은 건물도 있고, 이발소라 여겨지는 곳도 있고, 심지어 한국어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있고, 모든 것이 새롭고 관심을 일으킨다. 여기네 사람들의 삶도 내가 사는 곳의 삶과 큰 차이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같은, 정말 평범한 동네라서 나와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유독 놀라운 것은 생각 이상으로 동네가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역주변 번화가(그래봤자 버스 정류장, 마트가 있는 정도)를 제외하고 기괴할 정도로 소음이라 여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나라 같이 배달이 활성화 되어 있지만,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기반의 배달이 이루어지니 원천적으로 소음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오토바이 배달 행태를 보면 개선해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신호위반은 기본, 교통질서 위반, 불법 주정차, 무면허 운전 등 온갖 요소들이 신경 노이로제의 원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 이뤄져야 무서움을 알고 안할텐데 온정주의가 모든 것을 망치는 듯한 느낌이다. 할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첫번째 성지순례 장소인 빵집이 나타난다. 이름은 '기무라야(木村屋)'. 주인공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가 연애를 시작하고 달달한 시절을 보내는 초반에 야키소바빵을 사러 들리는 빵집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성지순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빈번하다고 들었다. 오늘로써 나도 그 인원 중 한명이 된다. 

 

빵집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촬영할 때와는 시간이 흘렀기에 세부적인 모습들은 살짝 변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화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늙으신 할머니 한 분만이 가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느낌상으로는 저분이 빵집 주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마치 빵을 사러온 것처럼 어떤 빵을 살까 짧게 고민하다 고로케 3개를 계산하였다. 3개에 350엔. 이 정도 가격이면 너무나도 혜자다. 계산을 마칠 쯤, 조심스럽게 문의를 드린다. 

 

"すいません。 お店の写真とらせていただいてもよろしいでしょうか?

" 楽に撮ってください。"

 

 

 

▶ 영화 '빵집 장면'

 

빵을 팔지만, 빵집 같지 않은 느낌. 한쪽 벽에는 각종 그림 액자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군것질용으로 보이는 과자와 음료가 있다. 아마, 엄마와 함께 오는 아이들 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 같다는 추측이 든다. 도심의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의 빵집과는 거리가 전혀 반대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예전 우리네와 비슷한 평범한 빵집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정감이 간다. 계산대 옆에는 남녀 주연 배우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친필 사인이 영화 포스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빵집이 등장한 시간은 고작 10초 내외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초반의 산뜻한 느낌을 표현하였던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배우들도 여기서 촬영이 즐거웠기에 이렇게 친필 사인까지 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소에 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친필 사인까지 보다니, 흥분의 도가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치토세가라스마역으로 돌아와 케이오선을 타고 쵸후역으로 간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남았으니, 계획대로 두번째와 세번째 성지순례를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램과는 달리, 쵸후역에 도착하니, 흐리기만 했던 구름은 어느새 폭우를 동반한 비 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카페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느껴 일단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걸리는 장소. 비만 안왔다면 걸어가면서 주변 구경도 하였을테지만, 이런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버스틀 타기로 했다.

 

아뿔싸, 비가 내리는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도로가 정체이다. 중심 도로까지 빠져나가는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세번째 성지순례는 못갈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만 있다. 6 정거장 뒤에 내려야 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소리에만 집중한다. 물론 마음은 비를 원망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해서 목적지까지 걷는다. 비가 내리는 것을 넘어서 퍼붓듯이 쏟아져 내린다. 하필 왜 비가 오는거야. 

 

퍼붓는 피를 뚫고 간신히 두번째 성지순례지인 오토자카 다리(御塔坂橋)에 도착했다. 이 곳에 와야했던 이유는 딱 하나,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가 이루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남녀는 이곳 횡단보도에서 역사적인 첫 키스를 하고 사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두 사람이 키스를 하였던 위치를 추정,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비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일단 한 손에는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있는데 바람이 불고 각도가 맞지 않는 등 사진 찍기가 영 쉽지 않다. 여차저차해서 사진을 찍긴 하였지만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등 제대로 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날씨 상태가 계속 안좋아져서 이대로는 세번째 성지순례 예정지인 남녀 주인공이 동거를 시작한 집이 있는 타마가와라 다리(多摩川原橋)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간다. 

 

※ 그날 숙소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곳은 오토자가 다리 남쪽 횡단보도였다. 북쪽 횡단보도에서 키스를 한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남쪽 횡단보도와는 고작 50m 정도 차이였는데.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지 않았던 나의 큰 실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아. 

 

 

▶ 영화 '첫 키스 횡단보도 장면'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오니 5시 50분. 앨리샤가 퇴근을 하고 쵸후역으로 오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거 같다는 연락을 주어서 근처 New York이라 상호명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산을 썼는데도 생각보다 비에 많이 젖어 추위를 느꼈는데 따뜻한 라떼를 마시니 몸이 살짝 녹는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앨리샤가 카페에 들어오는게 보인다. 지난 3월에는 신주쿠에서 만났는데, 그때 쵸후로 가겠다고 약속을 해서 이곳에서 만난다. 6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소중한 인연.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 쵸후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너무나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앨리샤한테 말한다. 앨리샤도 쵸후 자랑을 하면서 이곳저곳에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다음에도 꼭 오라고. 맥주 한잔을 곁을여 6개월단의 서로의 근황을 먼저 물어본다. 앨리샤는 여전히 옛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요리를 잘 못하니 남편이 요리를 만드는 것도 고려했었다고. 서로의 이야기 이외에도 일본에 오기전부터 궁금했던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대학원 사람들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도 공유하며 15년전의 추억에 잠겼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시간은 9시 30분.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쵸후에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앨리샤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쵸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앨리샤도 다음에는 더 좋은 장소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하며 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6개월만의 만남은 3시간으로 끝났지만, 좋은 인연을 먼 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알찬 시간이었다. 

 

 

케이오선을 타고 다시 신주쿠역으로. 앨리샤를 만난 즐거움이 가득하였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세번째 성지순례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컸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후보로만 생각해둔 장소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신주쿠역과 가까운 메이다이메이역에서 내려, 성지순례 장소로 향한다. 막차를 타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인 열차역과 결국 막차를 놓쳐 24시간 카페로 향하면서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다. 

 

▶ 영화: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 장면'

 

 

 

▶ 영화: '막차를 타기 위해 메이다이메이역 앞에서 부딪혀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장면'

 

메이다이메이역은 메이지대학의 이즈미 캠퍼스가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비오는 금요일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역은 매우 혼잡하다. 메이다이메이역의 일평균 이용객 수가 17만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환승역인 것을 감안하여도 높은 수치다. 역시 대학생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역 근처 술집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하는 대학생들, 직장인들, 또는 일반인들인가 보다. 

 

 

성지순례를 마지고 10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비만 내렸을 뿐인데 몇일간 고된 고생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뭔가 이대로 씻고 잠들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좋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느낌? 그래서 간단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고 우연히 발견한 뮤직 바를 방문한다. 

 

일본은 건물 안 또는 상가 내부에 진주처럼 숨어있는 바가 꽤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겉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련된 음악과 무거운 온도감의 조명의 분위기로 둘러쌓인 스타일의 바가 있다. 어둑한 느낌이 딱 좋다. 테이블도 많지 않고 아늑한 공간에서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과 한잔 즐기는 느낌이다. 

 

신주쿠에 있는 바 치고는 술 값이 싼 편이지만 커버차지가 별도로 700엔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가격이다. 한쪽 벽면에는 최근 핫한 음반들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  「First Love 初恋」 드라마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우타다 히카루의 한정 LP도 눈에 보인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는 히비키가 900엔으로 저렴하길래 주문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신청해서 감상한다. 

 

 

뮤직 바에서 나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싫어 호텔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걷는다.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아쉬움. 비만 아니었다면 다 좋았을텐데. 그러면서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질문에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도 아닌, 무엇을 보느냐도 아닌, 날씨라는 것. 

 

 

비 안개로 뒤덮은 초록색의 도코모 타워만이 밤을 강하게 빛낸다.

2023.09.20
 
도쿄 도착. 몇번째 도쿄인가. 2000년에 고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른채 도쿄에 온 이후, 이번까지 거의 20번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익숙함을 넘어 마치 집과 같은 느낌이다. 
 
입국 심사 구역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생각 이상으로 많다. 6개월전에 왔을 때는 코로나 제한으로 인해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해외 관광객 입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번에는 입국 심사 구역에서만 거의 1시간 가까이를 대기를 해야만 했다. 도착하는 시간에 비행기가 몰려서일까 입국 심사대의 업무가 느려서인걸까. 여러 이유를 생각해도 1시간은 지나치다는 결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간신히 입국 심사 구역을 통과하고 나리타 익스프레스 플랫폼으로 향한다. 신주쿠로 갈 때는 무조건 나리타 익스프레스다. 버스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애매한 타임 테이블, 그리고 운이 나쁘다면 수도고속도로 완간선(首都高速道路)의 정체(특히 날씨가 안좋을 경우)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바로 앞까지 간다는 것과 레인보우 브릿지를 지나가고 오다이바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에하나 있을 정체를 겪어야 한다는 것은 최악이라고 본다. 
 

 
다행히 날씨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저녁에 비 예보가 있는데 아직까지는 구름이 많아 흐릴 뿐, 날씨는 적당한 느낌이다. 1시간 정도 지나니 오사키를 지나면서 언제나봐도 익숙한 소니 시티 오사키가 보인다. 머지 않아 신주쿠역에 다다를 시점이다. 다카시마야 백화점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지. 
 
여전히 신주쿠역은 던전처럼 느껴지지만 처음 왔었을 때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라는 느낌은 더 이상 낯설다. 숙소는 항상 미나미구치쪽에 있으니 미나미구치 또는 신미나미구치만을 찾아가면 되니 어렵지가 않다. 그리고 야마노테선, 케이오선, 츄오 쾌속선, 츄오-소부 완행선을 이용하니 플랫폼 위치도 기억하고 있어 예전만큼의 혼란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오히려 이러한 복잡함을 현지 사람들처럼 즐기는게 익숙해졌다. 자연스럽게.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 정리를 한 후에 밖으로 다시 나온다. 28층 규모의 JR 히가시니혼(JR 東日本) 본사 건물이 눈앞에 보인다. JR 그룹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자산이나 매출액에서도 2위인 JR 도카이를 아득하니 뛰어넘으니 28층 건물 규모가 작게 느껴질 따름이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나카노로 향한다. 첫날은 무리하지 않게 둘러볼 예정이라 나카노 브로드웨이 및 주변 구경하는 것이 오늘의 주된 일정. 츄오-소부 완행선을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카노역에서 내려 나카노 브로드웨이로 향한다. 나카노역 기타구치에서 나와 직진하면 나카노 썬몰(中野サンモール)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다. 신주쿠의 혼잡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표현하자면 거대한 관광 거리 옆에 있는 동네 사람들만 가는 뒷길 같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볼 것은 더 많다. 나카노구 자체가 신주쿠구, 시부야구와는 달리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어 현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현지인들이 먹고 마시는 상권이 전형적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덕질을 위한, 덕후들을 위한 나카노 브로드웨이가 있다. 
 

 
도쿄 3대 덕후 성지인 아키하바라, 이케부쿠로(오토메 로드) 그리고 나카노 브로드웨이. 아키하바라는 말 그대로 덕후 입문을 위한 대중적인 곳이라면 이케부쿠로는 일부 에반게리온 덕후들(에바스토어 한정)과 여성 오덕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장소, 그리고 나카노 브로드웨이는 덕질을 어느정도 해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향 오타쿠들을 위한 곳이라 하겠다. 말 그대로 최신 트렌드가 아닌 시간이 멈춘 것들에 대한 덕후들이 모인다고 해야하나.
 

추억은 기억으로부터 망각으로 옮기는 도중에 잔존한 것이다.

 
 
아키하바라의 느낌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가 이곳 나카노 브로드웨이에서 느껴진다. 이런 물건도 있었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오래된 덕질템들이 대부분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일본 경제의 정점기일 때 함께 발전하였던 엔터테인먼트 산업 일부가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남아서 향수를 자극하고 이러한 향수를 향유하는 소비층들이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있다는 것은 부러울 따름이다. 울트라맨 시리즈, 고질라 시리즈를 비롯하여 세일러문, 각종 전대물, 애니메이션 시리즈 등 한번쯤 TV에서 보았던 혹은 들어보았던 것들이 전시되고 판매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경외감까지 들 정도이다. 이래서 왜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꼭 가보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될 듯 싶다. 
 
이러한 추억이라는 것이 내가 살았던 시대 혹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경외감을 가지는 나를 보면 나이만 든 철 없는 아저씨의 유난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80년대, 90년대 화려했던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정점을 함께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1인으로써, 그 당시 시절이 매우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거 같다. 
 
12만엔 짜리 스타워즈 콜렉터 코인을 보며 저런 물건이 예전에 존재했었나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고, 2006년에 발행된 북한 지폐를 보면서 저런거 사가면 국가보안법에 걸릴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세일러문 애니메이션 카세트 콜렉션을 보며 사고싶다라는 생각도 들고. 미궁 같은 나카노 브로드웨이 건물을 1층부터 4층까지 돌아다니며 추억에 잠겨서 좋았다. 사고 싶은 매력적인 물건들도 있었지만, 조만간 다시 도쿄에 올 계획이 있으니 일단 오늘은 구경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된 듯 싶다. 
 

 
기내식을 먹은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아 생각보다 빨리 배가 고파졌다. 나카노 브로드웨이를 나와 나카노 썬몰을 걸어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여행은 비로 시작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을 먹으면 오늘 저녁을 잘 먹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맛집에 꼭 가야한다라는 압박은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가서 맛있게 먹으면 그곳이 나에겐 맛집이기에, 일본식 스테이크와 카레 음식점으로 발을 향한다. 
 
사장님께 메뉴 추천을 받아 생맥주와 함께 주문하고 기다린다. 맥주가 나오는데, 피로가 쌓여서 그래서인지, 이렇게 맥주가 끌린적은 오랜만이다. 그리고 대망의 스테이크 카레가 나온다. 가격은 기억이 맞다면 1840엔. 맥주까지 포함된 이 가격이면 무척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한다. 맛도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고. 
 


 
식사를 하는 중에,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온다. 무슨 노래이지 계속 떠오르려고 하는데 떠오르지 않아 사장님께 물어본다. 
 
"すみません。もしかしてこの歌、誰が歌ったのか教えていただけますか?"
" マッキーです。"
" そうです、マッキー! やっと名前が浮かびました。"
 
역시,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Hungry Spider. 이렇게 비 내리는 저녁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가 흘러 나오다니. 비록 시작은 비로 가득했지만 맥주를 곁들이는 도쿄에서의 첫 일정을 잘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저녁을 마치고 나카노역까지 슬슬 걸어가본다. 비로 인하여 옷이 젖었지만 뭔가 이것도 낭만적이다. 멋진 곳에서, 멋진 음식과 맥주, 그리고 멋진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어 그것만으로 도시의 분위기에 빠져든다. 
 


 
일은 도쿄에 온 목적인 도쿄 게임쇼에 가는 날. 길었던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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