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0
도쿄 도착. 몇번째 도쿄인가. 2000년에 고등학교 때 아무것도 모른채 도쿄에 온 이후, 이번까지 거의 20번 가까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익숙함을 넘어 마치 집과 같은 느낌이다.
입국 심사 구역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 생각 이상으로 많다. 6개월전에 왔을 때는 코로나 제한으로 인해 그렇게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해외 관광객 입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번에는 입국 심사 구역에서만 거의 1시간 가까이를 대기를 해야만 했다. 도착하는 시간에 비행기가 몰려서일까 입국 심사대의 업무가 느려서인걸까. 여러 이유를 생각해도 1시간은 지나치다는 결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간신히 입국 심사 구역을 통과하고 나리타 익스프레스 플랫폼으로 향한다. 신주쿠로 갈 때는 무조건 나리타 익스프레스다. 버스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는 애매한 타임 테이블, 그리고 운이 나쁘다면 수도고속도로 완간선(首都高速道路)의 정체(특히 날씨가 안좋을 경우)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바로 앞까지 간다는 것과 레인보우 브릿지를 지나가고 오다이바를 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만에하나 있을 정체를 겪어야 한다는 것은 최악이라고 본다.
다행히 날씨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저녁에 비 예보가 있는데 아직까지는 구름이 많아 흐릴 뿐, 날씨는 적당한 느낌이다. 1시간 정도 지나니 오사키를 지나면서 언제나봐도 익숙한 소니 시티 오사키가 보인다. 머지 않아 신주쿠역에 다다를 시점이다. 다카시마야 백화점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내릴 준비를 해야지.
여전히 신주쿠역은 던전처럼 느껴지지만 처음 왔었을 때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라는 느낌은 더 이상 낯설다. 숙소는 항상 미나미구치쪽에 있으니 미나미구치 또는 신미나미구치만을 찾아가면 되니 어렵지가 않다. 그리고 야마노테선, 케이오선, 츄오 쾌속선, 츄오-소부 완행선을 이용하니 플랫폼 위치도 기억하고 있어 예전만큼의 혼란은 거의 없는 편이다. 오히려 이러한 복잡함을 현지 사람들처럼 즐기는게 익숙해졌다. 자연스럽게.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짐 정리를 한 후에 밖으로 다시 나온다. 28층 규모의 JR 히가시니혼(JR 東日本) 본사 건물이 눈앞에 보인다. JR 그룹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자산이나 매출액에서도 2위인 JR 도카이를 아득하니 뛰어넘으니 28층 건물 규모가 작게 느껴질 따름이다.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나카노로 향한다. 첫날은 무리하지 않게 둘러볼 예정이라 나카노 브로드웨이 및 주변 구경하는 것이 오늘의 주된 일정. 츄오-소부 완행선을 타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카노역에서 내려 나카노 브로드웨이로 향한다. 나카노역 기타구치에서 나와 직진하면 나카노 썬몰(中野サンモール)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다. 신주쿠의 혼잡함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표현하자면 거대한 관광 거리 옆에 있는 동네 사람들만 가는 뒷길 같다고 해야하나. 그런데 볼 것은 더 많다. 나카노구 자체가 신주쿠구, 시부야구와는 달리 주택가가 형성되어 있어 현지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는 곳이 많다보니 아무래도 현지인들이 먹고 마시는 상권이 전형적이다. 그리고 이곳에는 덕질을 위한, 덕후들을 위한 나카노 브로드웨이가 있다.
도쿄 3대 덕후 성지인 아키하바라, 이케부쿠로(오토메 로드) 그리고 나카노 브로드웨이. 아키하바라는 말 그대로 덕후 입문을 위한 대중적인 곳이라면 이케부쿠로는 일부 에반게리온 덕후들(에바스토어 한정)과 여성 오덕들의 취향을 저격하는 장소, 그리고 나카노 브로드웨이는 덕질을 어느정도 해봤다라고 말할 수 있는 과거향 오타쿠들을 위한 곳이라 하겠다. 말 그대로 최신 트렌드가 아닌 시간이 멈춘 것들에 대한 덕후들이 모인다고 해야하나.
추억은 기억으로부터 망각으로 옮기는 도중에 잔존한 것이다.
아키하바라의 느낌과는 확연하게 다른 분위기가 이곳 나카노 브로드웨이에서 느껴진다. 이런 물건도 있었어?라고 생각될 정도로 오래된 덕질템들이 대부분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일본 경제의 정점기일 때 함께 발전하였던 엔터테인먼트 산업 일부가 아직까지도 이곳에서 남아서 향수를 자극하고 이러한 향수를 향유하는 소비층들이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있다는 것은 부러울 따름이다. 울트라맨 시리즈, 고질라 시리즈를 비롯하여 세일러문, 각종 전대물, 애니메이션 시리즈 등 한번쯤 TV에서 보았던 혹은 들어보았던 것들이 전시되고 판매되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경외감까지 들 정도이다. 이래서 왜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꼭 가보라고 했는지 이제 이해가 될 듯 싶다.
이러한 추억이라는 것이 내가 살았던 시대 혹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그렇지 않은 누군가에게는 나카노 브로드웨이에 경외감을 가지는 나를 보면 나이만 든 철 없는 아저씨의 유난이라고 볼 수 있을 거 같다. 그래도 80년대, 90년대 화려했던 일본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정점을 함께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1인으로써, 그 당시 시절이 매우 즐거웠고 행복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거 같다.
12만엔 짜리 스타워즈 콜렉터 코인을 보며 저런 물건이 예전에 존재했었나 스스로에게도 물어보고, 2006년에 발행된 북한 지폐를 보면서 저런거 사가면 국가보안법에 걸릴까라는 생각도 해보고, 세일러문 애니메이션 카세트 콜렉션을 보며 사고싶다라는 생각도 들고. 미궁 같은 나카노 브로드웨이 건물을 1층부터 4층까지 돌아다니며 추억에 잠겨서 좋았다. 사고 싶은 매력적인 물건들도 있었지만, 조만간 다시 도쿄에 올 계획이 있으니 일단 오늘은 구경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 된 듯 싶다.
기내식을 먹은 이후 아무것도 먹지 않아 생각보다 빨리 배가 고파졌다. 나카노 브로드웨이를 나와 나카노 썬몰을 걸어본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여행은 비로 시작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것을 먹으면 오늘 저녁을 잘 먹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맛집에 꼭 가야한다라는 압박은 가지고 있지 않아, 내가 가서 맛있게 먹으면 그곳이 나에겐 맛집이기에, 일본식 스테이크와 카레 음식점으로 발을 향한다.
사장님께 메뉴 추천을 받아 생맥주와 함께 주문하고 기다린다. 맥주가 나오는데, 피로가 쌓여서 그래서인지, 이렇게 맥주가 끌린적은 오랜만이다. 그리고 대망의 스테이크 카레가 나온다. 가격은 기억이 맞다면 1840엔. 맥주까지 포함된 이 가격이면 무척 가성비가 좋다고 생각한다. 맛도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고.
식사를 하는 중에, 귀에 익숙한 노래가 나온다. 무슨 노래이지 계속 떠오르려고 하는데 떠오르지 않아 사장님께 물어본다.
"すみません。もしかしてこの歌、誰が歌ったのか教えていただけますか?"
" マッキーです。"
" そうです、マッキー! やっと名前が浮かびました。"
역시, 마키하라 노리유키의 Hungry Spider. 이렇게 비 내리는 저녁 분위기와 어울리는 노래가 흘러 나오다니. 비록 시작은 비로 가득했지만 맥주를 곁들이는 도쿄에서의 첫 일정을 잘 마무리하는 느낌이다. 저녁을 마치고 나카노역까지 슬슬 걸어가본다. 비로 인하여 옷이 젖었지만 뭔가 이것도 낭만적이다. 멋진 곳에서, 멋진 음식과 맥주, 그리고 멋진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듣게 되어 그것만으로 도시의 분위기에 빠져든다.
내일은 도쿄에 온 목적인 도쿄 게임쇼에 가는 날. 길었던 하루를 이렇게 마무리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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