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고 영상은 1분 40초부터.
3개월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수십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2024년 11월 10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평범했던 우리 가족의 삶이 재앙으로 변한 날이었다. 여름에 갔었던 안성 '풍사니랑'이 인상에 깊게 남아 가을이 되면 아이랑 다시 오자고 약속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집으로 차를 몰았다.
시골길이라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지만 아이가 타고 있어 40-50km의 속도로 2차선 도로를 천천히 주행했다. 출발한지 3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한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오는게 눈에 보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차량 속도를 줄였고 동시에 경적을 수번 울렸다. 이정도면 상대방이 속도를 줄이고 다시 자신의 차선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차는 빠른 속도로 계속 달려왔고 그대로 우리 가족이 타고 있던 차량을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정면 충돌의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충돌을 당할 때 정신을 살짝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눈을 떠보니 엔진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아이 울음 소리가 크게 들렸고, 와이프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를 먼저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안전벨트를 풀고 뒷자리로 가서 카시트에 앉혀있던 아이를 꺼내서 안고 근처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차로 돌아와 얼굴에 피로 흥건한 와이프를 부축하여 아이 옆에 앉혔다. 두 사람이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그제서야 오른손과 가슴에서 뭔가 부러진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들어눕고 싶었지만 차량 사진을 찍어두는게 나중에 도움이 될거 같아 아픈 몸을 이끌고 차량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와중에 상대 차량 운전자가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괜찮으신가요?"
"지금 괜찮아 보이나요? 아이가 다쳤다구요. 아이가 저기서 피를 흘리자나요!! 운전을 어떤식으로 한거에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요. 감기약을 먹고 졸음 운전을 했나봅니다"
이렇게 말하며 감기약을 꺼내서 보여주며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정신이 없어서 그 사람 말에 더 이상 대꾸하기가 싫었다. 통증도 점차 심해져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와 와이프 근처로 이동해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와중에도 경찰에 연락해 사고 신고를 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119가 도착하였다. 상대 차량 운전자가 연락을 했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뒤에서 오던 차량 운전자분이 신고를 해주시고 2차 사고가 나지 않게 교통 정리도 해주신 것이었다. 차량 운전자분 동승자분은 와이프와 아이 옆에서 안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계셨다.
통증이 심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거 같다고 생각될 때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은 먼저 나에게 상태가 어떻냐고 물어보고 이후 신상, 사고 발생 경위 등을 물어보았다. 정신이 여전히 있었기에 또박또박 말하였다. 모든게 사고 내용이 되기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후 음주 측정을 하였고, 상대방 운전자에게도 사고 경위 등을 물어보고 음주 측정을 하였다.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경찰은 사건 번호를 알려준 후, 사고 차량을 촬영 후 구급 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구급 대원이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길래, 오른쪽 팔과 가슴쪽에서 통증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보다 아이와 와이프를 먼저 이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구급 대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대방 차량에 탑승한 인원 중 한명도 다쳤다고 해서 이송 우선 순위를 두고 고민을 하는듯 싶었다. 몇 분 후, 구급 대원이 와서 이송 순서를 설명해주었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가 2대밖에 안되어서 와이프와 아이, 그리고 상대방 차량의 부상자를 각각 먼저 이송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추가 구급차가 5-10분 이내에 도착하니 나는 해당 구급차를 타고 이동해야할거 같다고 알려주셨다. 일단 아이와 와이프가 중요하니, 내가 어떻게 되든,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거기에다가 장인 어른이 계시는 오산 한국병원으로 이송을 부탁드렸다. 아무래도 장인 장모님이 가까이 계시는 곳이 향후 치료를 고려한다면 나을거 같다는 판단이었다. 와이프와 아이한테 괜찮을거야, 아무렇지도 않을거야라고 말하고 떠나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제발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와이프와 아이가 떠난 뒤에야 전기 충격을 받는 듯한 상상도 못할 통증이 전신에 흘렀다. 그제서야 교통 사고의 피해자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가 빨리 왔으면 하는 간절함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드디어 구급차가 왔다. 탑승하기 전에 아까 교통 정리를 해주신 차량 운전자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렸다. 괜찮아지면 꼭 연락드리겠다고, 절대로 은혜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구급차에 탑승했다. 이제야 병원에 가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송 중에 구급 대원이 여러 병원에 연락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의사 파업이라 병원 수용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 상황을 내가 마주하게 되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때마침 장인 어른에게 사고 소식을 들었는지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구급 대원에게 대신 전화를 받아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구급 대원은 현재 나의 상태를 비롯해서 이송할 병원이 어디인지 등을 말하였다. 그리고 환자 상태로 보아 위중한 상태는 아니기에 아주대병원, 동탄 한림대병원, 분당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으로의 이송은 어렵다고 언급하였다. 아마 아버지가 대학 병원으로 이송을 강력하게 요청하셨나보다. 안성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 병원이 동탄 한림대병원인데 거기까지도 편도 1시간 내외 소요되기에 구급차가 가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이동 거리였다. 구급 대원이 여러 곳에 전화를 한 끝에 안성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수용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3-40분 정도 지나 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원 직원에게 인계된 나는 응급실로 이동되었고, 응급실 당직 의사와 간호사에게 상태를 체크 받았다. 외부 출혈 여부를 먼저 확인하고, 어디가 가장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통증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그리고 엑스레이와 CT 촬영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응급실에 온지 1시간쯤 지났을까, 당직 의사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나의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오른쪽 손목은 골절이 되어 수술이 필요하고, 갈비뼈 4개가 부러졌고, 폐에 출혈로 보이는 흔적이 보인다고 알려주시며 즉각 입원을 해야한다고 말씀을 주셨다. 오늘은 수술이 어려워 내일 중으로 손목 수술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추가로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오른팔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6인실은 빈 곳이 없어 2인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을 하게 되니 갑자기 슬픔과 분노가 몰려왔다. 내가 다친 것도 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평범했던 즐거웠던 일요일 오후가 교통 사고로 망가져버려서였다. 그쪽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했으면, 아니 풍사니랑을 아예 처음부터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와이프와 아이는 괜찮을까, 어디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까, 연락이 안되니 오만가지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으니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다. 정상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불편해졌다. 나의 오른팔은 괜찮을까, 다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장애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등 머리 속이 복잡했다.
입원하고 1-2시간쯤 지나 부모님이 분당에서 오셨다. 엄마는 내 상태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쉬셨다. 그리고선 장인 어른과 통화를 하셨다고 말씀주시면서 와이프와 아이는 괜찮다고 하셨다. 와이프는 타박상을, 아이는 눈썹이 찢어졌다고 알려주셨다. 크게 다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다친게 가장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의 상태에 대해 듣고서는 대학 병원으로 입원이 가능한지를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시며 문의를 하셨다. 그때 아주대병원에서 근무하는 아는 동생이 떠올라 동생 연락처를 아버지에게 알려주며 연락을 해보라고 알려드렸다.
아는 동생과 연락을 하고 다시 입원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주대병원으로 전원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셨다. 아는 동생이 정형외과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연락을 취해 수술 및 입원 가능 여부 등을 확인해주겠다고 하였다. 다만 의료 파업으로 인해 당장은 어렵고 화요일에 병실이 생긴다고 하여 그때까지만 이곳에 입원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주었다. 안성 성모병원도 나쁘지는 않지만 다른 병원에서 세컨 오피니언을 듣는 것도 이로울 것이라 판단하였다. 게다가 향후 통원 및 재활 치료까지 생각한다면 아주대병원이 더욱 다니기에도 가깝기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는 당직 간호사에게 대학병원으로의 전원 및 수술 취소를 말씀하셨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가는 것은 아니기에 이틀 정도 이곳에서 있으며 아주대병원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부모님은 가해자의 연락처를 받고, 나에게 걱정말고 편히 자라고 안심시켜준 뒤에 집으로 돌아가셨다. 진통제를 먹어서인가 사고후에 계속 지속된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 앉은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2024년 11월 10일, 악몽이었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기억의기억'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달 뒤가 기다려지는. (0) | 2024.04.29 |
---|---|
내가 웃을 수 밖에 없는 이유. (0) | 2024.01.15 |
2023년 안녕, 2024년 안녕 (0) | 2023.12.30 |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해질 우리에게. (0) | 2023.11.19 |
[KBO] LG 트윈스 2023 한국 시리즈 우승! (0) | 2023.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