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2 

 

긴자에서 돌아와 숙소에 잠시 들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음 일정의 중심인 쵸후시의 중심지 쵸후역로 향한다. 도쿄도에 있으나 도쿄 23구에는 속하지 않는 행정 구역, 타마 지구이다. 한국으로 비유하자면 서울과 인접한 광명시, 과천시, 안양시라고 할 수 있겠다. 쵸후역까지는 신주쿠역까지는 케이오선을 타고 20분 내외 정도. 여행이든 출장이든 수십번 도쿄를 왔지만, 도쿄를 벗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쵸후로 가는 이유는, 대학원때 함께 GSA를 했었던 앨리샤가 여기서 살고 있어 만나기 위해, 그리고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무대 탐방을 하기 위해서다. 

 

 

신주쿠 서부 지역의 철도 교통을 책임지고 있는 일본의 16개 대형 사철 중 하나인 케이오 전철. 우스갯소리로 케이오 전철이 멈추면 타마 지역, 특히 쵸후시, 후추시, 히노시에 사는 사람들의 출퇴근이 불가능하다라고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케이오 전철이 멈출리는 없으니 (극단적인 다이어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그런 걱정은 살짝 내려 놓자. 

 

앨리샤와의 약속까지는 아직도 2시간 정도 여유가 있어, 오늘 가보고자 했던 영화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花束みたいな恋をした)」 촬영지 중 한 곳을 먼저 가보기로 한다. 신주쿠역에서 케이오선을 타고 치토세가라스마역에서 내린다. 서쪽으로 갈수록, 신주쿠역에서 멀어질수록 화려한 고층 빌딩이 사라지고 수수한 저층 건물들이 눈에 많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이런 변화를 보는 것도 새로운 곳으로 가보는 것도 여행의 묘미인듯 싶다. 역에서 내려 가장 먼저 간 곳은 슈퍼마켓. 성환이형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폴리탄 이야기가 나왔는데 슈퍼마켓에 가면 나폴리탄 소스를 살 수 있다고 해서 냉큼 눈에 보이는 이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둘러보니 나폴리탄 소스가 눈에 보인다. 드디어 소스를 구하다니! 이제 한국 가서도 나폴리탄의 맛을 그대로 느껴봐야지. 

 

 

현지 사람들의 사는 동네를 본다는 것은 여행자로서 큰 특권인 듯 싶다. 아시아, 중동, 남미 등 배낭여행을 할 때 여러 좋았던 모습들 중에 기억이 난다면, 현지 사람들의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거창히 말하자면 투어이고, 소박하게 말하자면 천천히 걸어다니기. 시리아 다마스커스의 대형 바자르, 이란 야즈드의 이름 모를 올드 타운, 볼리비아 코차밤바의 시내 거리 등 현지 사람들의 생활이 보여지는 곳을 구경하다보면 어느샌가 이들의 삶의 가운데에 들어가있는게 느껴진다.

 

주택가로 이루어진 동네를 걷고 있다보니 모든게 호기심투성이다. 집 구조는 어떨까, 어떤 가게가 있을까, 무엇을 하는 곳일까 등 동네 사람이 아니고서는 모를만한 것들이 궁금함을 이끌어낸다. 항상 고층 건물로만 가득했던 사람들로만 가득했던 공간에서 벗어나 현지 사람들이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걸어다니니 마치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느낌이라 여겨진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아 봐와서 아주 익숙한 형태의 맨션이나 단독주택이 있고,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빵집이 보이고, 목욕탕 같은 건물도 있고, 이발소라 여겨지는 곳도 있고, 심지어 한국어 간판이 걸린 음식점이 있고, 모든 것이 새롭고 관심을 일으킨다. 여기네 사람들의 삶도 내가 사는 곳의 삶과 큰 차이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유명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같은, 정말 평범한 동네라서 나와 같은 낯선 이방인에게는 일상적인 모든 것들이 흥미를 자극한다. 

 

유독 놀라운 것은 생각 이상으로 동네가 깨끗하고, 조용하다는 것이다. 역주변 번화가(그래봤자 버스 정류장, 마트가 있는 정도)를 제외하고 기괴할 정도로 소음이라 여겨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일본도 우리나라 같이 배달이 활성화 되어 있지만,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로 기반의 배달이 이루어지니 원천적으로 소음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와 일본의 상황이 다르겠지만, 오토바이 배달 행태를 보면 개선해야 할 것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고 생각한다. 신호위반은 기본, 교통질서 위반, 불법 주정차, 무면허 운전 등 온갖 요소들이 신경 노이로제의 원인이다. 이러한 것들은 강력한 규제와 처벌이 이뤄져야 무서움을 알고 안할텐데 온정주의가 모든 것을 망치는 듯한 느낌이다. 할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주택가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첫번째 성지순례 장소인 빵집이 나타난다. 이름은 '기무라야(木村屋)'. 주인공 무기(스다 마사키)와 키누(아리무라 카스미)가 연애를 시작하고 달달한 시절을 보내는 초반에 야키소바빵을 사러 들리는 빵집이다. 영화의 흥행으로 성지순례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빈번하다고 들었다. 오늘로써 나도 그 인원 중 한명이 된다. 

 

빵집은 영화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촬영할 때와는 시간이 흘렀기에 세부적인 모습들은 살짝 변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영화에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밖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 안으로 들어갔다. 늙으신 할머니 한 분만이 가게를 지키고 계시는데 느낌상으로는 저분이 빵집 주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마치 빵을 사러온 것처럼 어떤 빵을 살까 짧게 고민하다 고로케 3개를 계산하였다. 3개에 350엔. 이 정도 가격이면 너무나도 혜자다. 계산을 마칠 쯤, 조심스럽게 문의를 드린다. 

 

"すいません。 お店の写真とらせていただいてもよろしいでしょうか?

" 楽に撮ってください。"

 

 

 

▶ 영화 '빵집 장면'

 

빵을 팔지만, 빵집 같지 않은 느낌. 한쪽 벽에는 각종 그림 액자가 걸려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군것질용으로 보이는 과자와 음료가 있다. 아마, 엄마와 함께 오는 아이들 또는 초등학교 학생들을 위한 것 같다는 추측이 든다. 도심의 세련되고 깔끔한 느낌의 빵집과는 거리가 전혀 반대 분위기가 감도는, 지금은 거의 사라진 예전 우리네와 비슷한 평범한 빵집이다. 그래서일까. 더욱 정감이 간다. 계산대 옆에는 남녀 주연 배우 스다 마사키와 아리무라 카스미의 친필 사인이 영화 포스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영화에서 빵집이 등장한 시간은 고작 10초 내외였음에도 불구하고, 연애 초반의 산뜻한 느낌을 표현하였던 상징적인 장소였기에 배우들도 여기서 촬영이 즐거웠기에 이렇게 친필 사인까지 해주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좋아하는 영화의 장소에 올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친필 사인까지 보다니, 흥분의 도가니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성지순례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다시 치토세가라스마역으로 돌아와 케이오선을 타고 쵸후역으로 간다. 약속 시간까지는 약 1시간 30분 정도 남았으니, 계획대로 두번째와 세번째 성지순례를 충분히 마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바램과는 달리, 쵸후역에 도착하니, 흐리기만 했던 구름은 어느새 폭우를 동반한 비 구름으로 바뀌어 있었다. 성지순례를 포기하고 카페에서 기다릴까도 생각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간다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고 느껴 일단 가보기로 마음을 정했다. 도보로 약 15-20분 정도 걸리는 장소. 비만 안왔다면 걸어가면서 주변 구경도 하였을테지만, 이런 날씨에 걷는다는 것은 무리였기에 버스틀 타기로 했다.

 

아뿔싸, 비가 내리는 금요일 퇴근 시간이라 도로가 정체이다. 중심 도로까지 빠져나가는데만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무래도 세번째 성지순례는 못갈 확률이 점차 높아지고만 있다. 6 정거장 뒤에 내려야 하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안내소리에만 집중한다. 물론 마음은 비를 원망하면서. 정류장에 도착해서 목적지까지 걷는다. 비가 내리는 것을 넘어서 퍼붓듯이 쏟아져 내린다. 하필 왜 비가 오는거야. 

 

퍼붓는 피를 뚫고 간신히 두번째 성지순례지인 오토자카 다리(御塔坂橋)에 도착했다. 이 곳에 와야했던 이유는 딱 하나,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의 첫 키스가 이루어진 장소이기 때문이다. 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두 남녀는 이곳 횡단보도에서 역사적인 첫 키스를 하고 사귀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당연히 오지 않을 수 없지 않는가.

 

두 사람이 키스를 하였던 위치를 추정,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비 때문에 매우 불편하다. 일단 한 손에는 우산이,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이 있는데 바람이 불고 각도가 맞지 않는 등 사진 찍기가 영 쉽지 않다. 여차저차해서 사진을 찍긴 하였지만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는 등 제대로 된 것을 찾기가 어려웠다. 날씨 상태가 계속 안좋아져서 이대로는 세번째 성지순례 예정지인 남녀 주인공이 동거를 시작한 집이 있는 타마가와라 다리(多摩川原橋)는 눈물을 머금고 포기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간다. 

 

※ 그날 숙소로 돌아와 확인해보니 두 사람이 키스를 했던 곳은 오토자가 다리 남쪽 횡단보도였다. 북쪽 횡단보도에서 키스를 한 장소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남쪽 횡단보도와는 고작 50m 정도 차이였는데. 마지막까지 확인을 하지 않았던 나의 큰 실수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아. 

 

 

▶ 영화 '첫 키스 횡단보도 장면'

 

다시 쵸후역으로 돌아오니 5시 50분. 앨리샤가 퇴근을 하고 쵸후역으로 오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걸릴거 같다는 연락을 주어서 근처 New York이라 상호명이 있는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우산을 썼는데도 생각보다 비에 많이 젖어 추위를 느꼈는데 따뜻한 라떼를 마시니 몸이 살짝 녹는다. 핸드폰을 충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까. 앨리샤가 카페에 들어오는게 보인다. 지난 3월에는 신주쿠에서 만났는데, 그때 쵸후로 가겠다고 약속을 해서 이곳에서 만난다. 6개월만에 다시 만나는 소중한 인연. 

 

근처 이자카야로 이동, 쵸후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 너무나도 잘한 결정이었다고 앨리샤한테 말한다. 앨리샤도 쵸후 자랑을 하면서 이곳저곳에 볼거리들이 많이 있다고, 다음에도 꼭 오라고. 맥주 한잔을 곁을여 6개월단의 서로의 근황을 먼저 물어본다. 앨리샤는 여전히 옛 직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하며 자신의 집에 초대를 할까 무척 고민을 했다고 한다. 자신이 요리를 잘 못하니 남편이 요리를 만드는 것도 고려했었다고. 서로의 이야기 이외에도 일본에 오기전부터 궁금했던 여러 이슈들에 대해서도 물어보고, 대학원 사람들의 최근 근황에 대해서도 공유하며 15년전의 추억에 잠겼다. 

 

만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시간은 9시 30분.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쵸후에 초대해줘서 고맙다고 앨리샤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다음에도 쵸후에서 만나자고 약속했다. 앨리샤도 다음에는 더 좋은 장소를 구경시켜주겠다고 하며 와줘서 고맙다고 한다. 6개월만의 만남은 3시간으로 끝났지만, 좋은 인연을 먼 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알찬 시간이었다. 

 

 

케이오선을 타고 다시 신주쿠역으로. 앨리샤를 만난 즐거움이 가득하였지만, 왠지 한편으로는 세번째 성지순례를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여전히 컸다. 이대로 돌아가기는 아쉬워, 후보로만 생각해둔 장소를 가보기로 결심했다. 신주쿠역과 가까운 메이다이메이역에서 내려, 성지순례 장소로 향한다. 막차를 타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만나는 장소인 열차역과 결국 막차를 놓쳐 24시간 카페로 향하면서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다. 

 

▶ 영화: '서로의 공통 취향을 발견한 굴다리 장면'

 

 

 

▶ 영화: '막차를 타기 위해 메이다이메이역 앞에서 부딪혀 만나게 되는 두 사람 장면'

 

메이다이메이역은 메이지대학의 이즈미 캠퍼스가 근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인지 비오는 금요일 늦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역은 매우 혼잡하다. 메이다이메이역의 일평균 이용객 수가 17만명 가까이 된다고 하는데 환승역인 것을 감안하여도 높은 수치다. 역시 대학생들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역 근처 술집에도 사람들이 가득하다. 이대로 집에 가기 아쉬워하는 대학생들, 직장인들, 또는 일반인들인가 보다. 

 

 

성지순례를 마지고 10시가 넘어서야 숙소에 돌아왔다. 비만 내렸을 뿐인데 몇일간 고된 고생을 한 듯한 느낌이다. 그런데, 뭔가 이대로 씻고 잠들기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한 것은 좋았지만, 그 외의 것들은 비 때문에 제대로 즐기지 못한 느낌? 그래서 간단히 샤워만 하고 옷을 갈아입고 우연히 발견한 뮤직 바를 방문한다. 

 

일본은 건물 안 또는 상가 내부에 진주처럼 숨어있는 바가 꽤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겉에서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세련된 음악과 무거운 온도감의 조명의 분위기로 둘러쌓인 스타일의 바가 있다. 어둑한 느낌이 딱 좋다. 테이블도 많지 않고 아늑한 공간에서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과 한잔 즐기는 느낌이다. 

 

신주쿠에 있는 바 치고는 술 값이 싼 편이지만 커버차지가 별도로 700엔이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가격이다. 한쪽 벽면에는 최근 핫한 음반들을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  「First Love 初恋」 드라마로 다시 인기를 끌고 있는 우타다 히카루의 한정 LP도 눈에 보인다. 한국에서는 구하기가 어렵다는 히비키가 900엔으로 저렴하길래 주문했다. 그리고 오아시스의 Don't Look Back In Anger를 신청해서 감상한다. 

 

 

뮤직 바에서 나와 숙소로 바로 들어가기 싫어 호텔 주변을 한바퀴 천천히 걷는다.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아쉬움. 비만 아니었다면 다 좋았을텐데. 그러면서 예전부터 스스로에게 물어보던 질문에 답을 찾은 느낌이 들었다. 결국,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를 만나느냐도 아닌, 무엇을 보느냐도 아닌, 날씨라는 것. 

 

 

비 안개로 뒤덮은 초록색의 도코모 타워만이 밤을 강하게 빛낸다.

2023.09.22. 

 

자, 오늘은 꽃다발 같은 사랑을 찾으러 가야지. TV를 보면서 나갈 채비를 하는데, 몇일전에 한국에서 발생한 만취 차량 대상 경찰의 총기 발포 사건이 뉴스를 타고 있었다. 음주 차량 관련 뉴스는 놀랍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총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체포를 한 것에 대해 놀라웠나보다. 뭐, 좋은 내용도 아니지만 이런 것으로 관심 있어하는 일본 정보 프로그램도 신선하기만 하다. 

 

 

오늘 일정은 정말 단순하다. 좋아하는 지인들을 만나고, 좋아하는 영화 성지 순례지를 찾는게 주된 일정. 후후후. 그전에 신주쿠 교엔을 가야지. 도쿄에 올 때마다 항상 들리는 이 곳.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주쿠교엔에서 짧게나마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잠시 시간을 멈추고 온전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다. 콘크리트의 색으로 가득찬 도심에서 자연의 색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잠시 와서 쉬어가라고 말하는 듯하다. 

 

9시 개장 시간에 맞춰 신주쿠 출입구에 도착. 이미 몇몇분들이 개장을 기다리고 있다. 사실, 오늘 이렇게 일찍 온 이유는 교엔 내에 위치한 스타벅스에 가고 싶어서였다. 교엔의 스타벅스는 핫플로 널리 알려져있다. 교엔의 중심에 위치해 있고, 도코모 타워 뷰와 나카노이케와 어울러진 멋진 뷰를 제공하고, 고상적인 분위기가 스타벅스를 더욱 묘미있게 만든다. 몇번 가보기 하였지만, 테이크아웃만 했지, 한번도 앉아서 여유를 부려본 적은 없어 이번에는 그런 여유를 누릴 생각이다.

 

 

신주쿠교엔의 문이 9시가 되자 열리고 얼마 안되었던 사람들이 천천히 입장을 한다. 누군가는 아침 산책하러, 누군가는 나처럼 커피를 마시러 열심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6개월 전에는 아직 덜 가신 추위였지만, 봄날의 바람에 분홍색 눈이 휘날리고, 그것을 눈에 담고 만끽하고자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었는데. 

 

開いたばかりの花が散るのを
「今年も早いね」と残念そうに
見ていたあなたはとても
きれいだった もし今の私を
見れたなら どう思うでしょう

 

지금은 가을의 문턱을 앞두고, 전날 내린 강한 비로 아직 가시지 않은 초록색 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고 떨어진 단풍이 마치, 오랜만이야 하고 반겨주는 듯하다. 

 

 

그러고보니 예전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한 기억이 떠오른다. 신주쿠 교엔의 스타벅스에서 창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팁이 있을까요라고. 그 당시 내 대답은 오픈하자마자 가서 앉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에요라고 답을 해주었는데, 사실 그게 가장 정확한 답이다. 9시에 교엔이 열리기에 빠른 걸음으로 - 중간에 구경하는 것은 생략하고 - 걸어가서 먼저 창가쪽 자리를 맡고 주문을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스타벅스에 도착하니 9시 7분. 빠른 걸음으로 왔는데도 내 앞에는 이미 2분이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하고 있다. 분명 센다가야 출입구나 오키도 출입구에서 오지 않았을까 생각이 된다. 일단 창가쪽 자리에 자리를 잡고, 주문을 한다. 긴자에서의 약속이 11시 30분이니, 한시간 정도 시간이 있으니 커피와 와플을 시키고 창가에 앉아 멋진 뷰를 즐긴다. 

 

 

창가 좌석에 가만히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홀가분해진다. 엊그제까지의 모든 피로가 녹아드는 그런 느낌이랄까. 아직은 사람들이 많지 않아 적막감만 감돈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살짝 고개를 둘러보니, 가장 일찍 도착한 것으로 보이는 노부부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으시고, 두번째로 온 젊은 사람은 음악을 듣고 있다. 저마다 각자만의 신주쿠 교엔을 즐기는 방법을 만끽하고 있나보다.

 

나도 이러한 분위기에 빠져들고 싶어,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사카모토 류이치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 대학교 3학년때, 아시아와 중동 오버랜드 배낭여행을 하면서 만났던 많은 여행자들은 거의 대부분 책을 옆에 두고 있었다. 기차를 기다릴때도, 숙소에서 쉴때도,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때도,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거기에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책과 함께였다. 첫 스마트폰이 나오기 3년전이었으니, 책과 보내는 시간은 잠시나마 긴 여행의 고독을 잊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교엔의 일본식 정자에 올 때마다 2013년 개봉했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언어의 정원(言の葉の庭)」에서 유키노와 타카오가 처음 만날 때 장면이 항상 오버랩이 된다. 그리고 유키노와 타카오가 서로에게 꺼냈던 만엽집의 시가가 너무나도 좋아 가끔씩 이렇게 떠오른다. 정자에서 유키노가 처음 타카오를 만났을때, 그녀는 그에게 너를 봤을지도 모르겠다며 만엽집의 단가를 읊으며 정자를 조용히 먼저 떠난다.

 

鳴る神の 少し響みて さし曇り 雨も降らぬか きみを留めむ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그러면 그대를 붙잡을 수 있을텐데. 

<만엽집 11권 2513번> 

 

이후, 타카오는 그녀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읊어주었던 만엽집의 단가에 대한 답가를 유키노에게 읊는다.

 

鳴る神の 少し響みて 降らずとも 吾は留まらん 妹し留めば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리며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당신이 붙잡아 주신다면 난 머무를 것입니다. 

<만엽집 11권 2514번>

 

 

한참동안 멍하니 정자를 바라보며 애니메이션의 장면에 잠시 빠져있다가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간걸 떠오르고 발걸음을 센다가야 출입구로 옮긴다. 도쿄의 한가운데에 있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여유롭고 편안한 휴식 시간이었다. 

 

센다가야역까지는 걸어서 약 10분 내외. 짧은 거리지만,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어하는 길이다. 마치 이곳에 살면서 아침에 "다녀오겠습니다" 말하고 역을 향해 걸어가는 느낌이려나. 이런 상상을 하는 것도 이번 도쿄 여행의 나만의 즐거움인 듯 싶다. 예전에는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것에만 집중해서 여유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도쿄를 자주 오다보니 이제는 이러한 낭만도 여유도 즐길 수 있는 여백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센다가야역에서 츄오 소부 완행선을 타고 요츠야역에서 마루노우치선으로 갈아탄다. 그러고보니 센다가야역과 요츠야역은 2016년 개봉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대히트작  「너의 이름은。(君の名は。) 의 배경으로 나오는데, 이제서야 그걸 알아채다니. 센다가야역은 엔딩 부근에 미츠하가 급히 열차에서 내릴때, 요츠야역은 타키와 오쿠데라 선배와 첫 데이트를 할 때 만나는 장소이다. 「너의 이름은」이 개봉한지 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도쿄에 무대 탐방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문화가 끼치는 파급력이 새삼 크다는걸 느낀다.

 

 

긴자에 도착, 성환이형을 만났다. 6개월 전에 만났는데도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가울 따름이다. 형이 바쁜 관계로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 형이 추천한 나고야식 미소카츠로 유명한 야바톤을 간다. 미소를 소스로 사용해서 먹는 카츠라. 오호! 과연 어떤 맛일까 궁금해진다. 소스만 본다면 매우 매울 것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전혀 맵지 않고 담백하고 부드럽기만 했다. 가격은 세트 기준으로 3,060엔으로 일반 가츠와 비교해서 비싸지만, 맛은 매우 뛰어난 가격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다. 

 

점심 후, 형과 커피를 마시며 6개월간 어떻게 지냈는지 등 여러 이야기를 쏟아낸다. 시간이 흘러가는 줄도 모르고. 형은 일본에 온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올때는 혈혈단신이었는데 이제는 결혼을 하고, 이쁜 아이도 키우는 아빠가 되어 터전을 잡고 뿌리를 내렸다는게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형도 학교 사람들 중에 꾸준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매우 극소수라고. 삶이 이곳에 있으니, 한국에 들어올 기회가 거의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연락이 뜸해졌다고 하는데, 내가 연락을 계속 해주는 게 정말 고맙다고 말한다. 나야말로 이렇게 타지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정말 좋을 따름이다. 

 

형은 다시 일터로 복귀해야해서, 자리에서 일어나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다. 2주뒤에 다시 도쿄에 온다고 했는데 그땐 형이 출장으로 도쿄에 없을거라고 미안하다고 하길래, 미안해하지 말라고. 형의 일이 중요하고, 나는 도쿄에 언제든지 또 올 수 있으니 그때 보자고 말한다. 형의 가는 뒷모습을 보고 나도 다음 일정으로 움직인다. 누군가를 만나서 반가울 수 있다는거, 그것도 낯선 공간에서. 그래서 도쿄는 설레임을 준다. 

 

 

다음 일정으로 가기 전, 긴자에 오면 항상 들리는 서점에 잠시 들린다. 일본에서 땅 값이 가장 비싸다는 긴자에는 '쿄분칸(教文館)'이라는 서점이 있다. 1885년에 창립되어 지금까지 긴자 중심 도로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아마도 명동 중심 거리에 100여년의 서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때는 사람들로 가득 찼었을 듯한 서점은 조용하기만 하다. 대낮인데도 서점에 있는 사람은 직원을 제외한 나를 포함해 2-3명 정도. 그것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분들이 전부이다. 분명, 밖은 쇼핑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더 이상 사람들이 텍스트를 어려워하고 책을 멀리하면서 그리고 온라인로 구매하거나 전자책의 등장의 여파는 이러한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쿄분칸'에도 타격이 되었을 것이다.

 

어디서 읽었던 거 같은데, 한 나라의 지적 문화는 서점의 수로 보여진다고. 도쿄라는 거대 도시의 한 가운데, 그것도 가장 비싼 지역에 서점이 있다는 것은 놀라울 따름이고 멋있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 쿄분칸'이 쌓은 거대한 역사도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할 거라고. 언젠가는 '쿄분칸'이 있는 이 자리에는 명품숍이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쿄분칸'이 앞으로도 계속 있어주길 바라며 도쿄에 올 때마다 항상 들릴 것이라는 마음가짐을 한다.

 

읽고 싶은 책 몇 권을 사고 이제 다음 일정을 향해 또 다시 움직인다. 안녕, 쿄분칸.

 

 

이제 초후로 넘어가야지.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