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0일은 재앙이었다.

■ 사고 영상은 1분 40초부터. 3개월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수십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2024년 11월 10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평범했던 우리 가족의 삶이 재앙으로 변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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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6일, 검찰 형사조정위원회에 참석하였다. 형사 사건에 대해 검사가 기소를 하기에 앞서 전문 조정 위원들이 가해자와 피해자와의 원만한 합의를 주선하는 제도라고 한다. 이를 통해 피해자의 신속한 피해 회복을, 가해자의 기소 유예 또는 선처 가능성을 높이 효과가 있다고. 

 

형사조정위원회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고 난 이후 거의 한달 가까이 고민에 쌓여 있었다. 합의는 별도라 생각하더라도 상대방을 마주친게 될 때 과연 상대방은 충분한 잘못을 뉘우치고 있을까 이게 가장 컸다. 사실은 마주치기도 싫었다. 사고가 나서 한달 후, 가해자는 경찰 조사가 끝나고 나서야 사과 연락을 해왔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안녕하세요. 가해자입니다. 괜찮으신가요? 이제 막 경찰 조사를 마치고 연락을 드렸습니다. 경찰에서 피해자한테 사과 연락을 해야한다고 해서 이제서야 전화 드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딱 이 말이 전부였다. 전화가 끝났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정녕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의 태도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평온했던 가족의 삶이 무너졌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어려워졌는데, 마치 사고가 재수없게 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나이가 70살 이상인거 같은데,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도 못꺼낼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언젠가 이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면전에서 실컷 욕해주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조정위원회 시간보다 살짝 빠르게 사건이 배당된 평택지청에 와이프와 함께 도착하였다. 바람이 매우 강하게 불었다. 아마 내 마음에는 블리자드가 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심장의 두근거림은 점차 빨라져만 갔다. 이런 나를 알아챘는지, 와이프가 잠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을 했다. 얼굴에서 내 마음이 보여졌나보다. 커피를 마시면서 와이프는 오늘 이야기는 내가 다 할테니 나보다는 차분하게 듣고만 있으라고 했다. 여기서는 화내는 사람이 지는것이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고,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때 가서 이야기를 하라고. 와이프가 하는 말이 맞았다. 여기서는 절대 흥분할 이유가 없다. 합의가 되면 되는거고, 아니면 아닌거고.

 

시간이 되어 조정위원회실로 들어갔다. 중간 사이즈 원탁 테이블이 있고, 테이블 위에는 조정위원, 고소인, 피고소이라고 적힌 명패가 놓여져 있었다. 고소인쪽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사이 어느덧 조정 시간이 되었다. 조정위원 2명이 들어와 나와 와이프의 안녕을 물은 뒤에 사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하고 생각하고 있는 예상 합의금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래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말하고 싶다라고 했더니 아직 가해자측이 없기에 조정위원들이 알아야 가해자측과 원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설득을 해서 우리가 생각하는 예상 금액을 말하였다. 

 

그리고 잠시 안되어서 가해자가 나타났다.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해자는 들어오자마자 대뜸 우리에게 오더니 죄송하다며 악수를 억지로 하는거였다. 나는 일부러 그 사람의 악수를 받지 않았고, 내가 안받자 당황한 듯 와이프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걸 보던 조정위원이 고소인들 가만히 두시고 자리에 가서 앉으시라고 정리를 해주셨다. 그제서야 가해자는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았다. 

 

조정위원, 와이프, 변호사가 열심히 말을 하는 동안 나는 묵묵히 가해자를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을 피할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가해자가 말을 꺼낼 때,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땐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신은 사과를 위해 연락을 여러번 취했다고 했을 때는 절대 참을 수가 없어 잠시 양해를 구하고 말을 꺼냈다.

 

"선생님, 여러번 연락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저에게 전화하신 적은 단 한번이었습니다. 아드님께서 전화하신적 있지만 제가 그땐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사고난 한달 후가 되서야 첫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 말이죠. 대리인이 전화를 했다고는 하지만 단순한 인사 치례였고 사과 또는 그와 관련된 내용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도 보니까 제 아이와 비슷한 나이대의 손자가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손자가 이만큼 다쳤다면 선생님은 가만히 있으실까요? 저희 가족들의 삶은 그 이후로 무너졌습니다. 저는 오른손을 못쓰고 있어 일상 생활 자체가 어렵습니다. 아이의 외적인 상처는 나아가고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아직도 낫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평생 마음에 두고 살 수도 있습니다. 저희가 과한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선생님께서 한마디 한마디 사실이 아닌 말을 하실 때마다 저희의 분노는 커져갈 수 있다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최대한 분노를 억누르며 차분하게 가해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가해자는 변명 아닌 변명만을 꺼내는 것이 치졸하게만 느껴졌다. 교통사고 가해자가 자신이 일으킨 인적 물적 피해에 대해 철면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에 분노를 넘어 한심스럽게만 보였다. 도데체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조정 시간이 점차 마무리로 향할 쯤에야 가해자측 변호사가 보상 가능한 합의금을 언급하였다. 물론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금액과는 차이가 있었다. 해당 금액에 당장 우리가 합의를 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었지만 와이프는 달리 생각할 수 있기에 잠시 시간을 요청하였고 별도의 사무실로 이동해서 이야기를 하였다. 

 

5-10분 정도 이야기를 하고 다시 조정위원회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간단히 우리의 의견을 전달했다. 제안하신 합의금에 대해서는 저희가 생각을 해보았으나 오늘 당장 결론을 내리기에는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다고. 이렇게 말하니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아니, 모든 것을 변호사에게 맡기고 있던 가해자가 말을 꺼냈다.

 

"저는 현재 무직이고 수입이 없고 와이프의 간병을 들어야 하는 상태라 그 점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이말은 즉슨, 운전자보험에 적용된 금액 이상으로는 주기 싫다고 들렸다. 그리고 (주관적일수도 있지만) 실실 쪼개면서 웃는 표정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당장이라도 가서 오른팔을 부러뜨리고 싶은, 아니 죽이고 싶은 생각이었다. 저게 인간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후 조정위원이 앞으로의 진행 과정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로부터 3월말까지는 추가로 합의할 수 있는 시기이고 그때까지 합의가 성립하지 않을 경우, 4월부터는 다시 기소가 진행될 것이라고. 상대방 변호사도 우리도 그것에 대해 이해를 했고 당장 오늘 결렬이 되었다고 해서 합의가 없는 것은 아니니 서로 합의하는 방향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가해자는 예상했던대로 안녕히 계시라는 말 한마디도 없이 자리를 떠버렸다. 자신의 잘못이 하나도 없다는 것처럼 주차장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쫒아가서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피해자는 몸과 정신이 망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또 다시 힘겨운 싸움을 해 나가야 하는데 가해자는 마치 아무일도 없이 홀가분스럽게 있다는게 절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만드는 대한민국 법이 X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게다가 합의를 강요하는 듯한 조정위원의 행동이나 그 모든 것들이 더욱 와이프와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차안에서 와이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등. 우리의 공통점은 그랬다. 합의금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다만 저 사람이 앞으로도 합의에 있어서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일지가 우리의 판단에 중요하다고. 그리고 변호사도 만나 상담하자고. 

 

푸르렀던 하늘이 어느새 앞이 안보일 정도로 강한 눈이 휘날리는 날씨로 변했다. 가해자를 4개월만에 다시 만난 오늘 날씨처럼 마음이 오락가락했다. 앞으로 얼마나 이런 처절한 마음을, 분노를 숨기면서 슬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할지. 눈으로 뒤덮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을 앞으로 걸어가야할지 걱정 가득한 마음이었던 하루였다. 

 

 

 

 

 

 
사고 영상은 1분 40초부터.
 

3개월만에 글을 쓰게 되었다. 그날로부터 수십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2024년 11월 10일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날은 평범했던 우리 가족의 삶이 재앙으로 변한 날이었다. 여름에 갔었던 안성 '풍사니랑'이 인상에 깊게 남아 가을이 되면 아이랑 다시 오자고 약속했었다. 그렇게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집으로 차를 몰았다.
 

 
 
시골길이라 도로는 비교적 한적했지만 아이가 타고 있어 40-50km의 속도로 2차선 도로를 천천히 주행했다. 출발한지 3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한 차량이 중앙선을 넘어오는게 눈에 보였다. 순간, 본능적으로 차량 속도를 줄였고 동시에 경적을 수번 울렸다. 이정도면 상대방이 속도를 줄이고 다시 자신의 차선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생각과는 다르게 상대차는 빠른 속도로 계속 달려왔고 그대로 우리 가족이 타고 있던 차량을 정면으로 들이박았다. 
 
정면 충돌의 충격은 생각 이상으로 심각했다. 충돌을 당할 때 정신을 살짝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눈을 떠보니 엔진에서는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고, 아이 울음 소리가 크게 들렸고, 와이프는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아이를 먼저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 안전벨트를 풀고 뒷자리로 가서 카시트에 앉혀있던 아이를 꺼내서 안고 근처 안전한 장소로 옮겼다. 그리고 다시 차로 돌아와 얼굴에 피로 흥건한 와이프를 부축하여 아이 옆에 앉혔다. 두 사람이 안전하다고 생각되지 그제서야 오른손과 가슴에서 뭔가 부러진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들어눕고 싶었지만 차량 사진을 찍어두는게 나중에 도움이 될거 같아 아픈 몸을 이끌고 차량 근처까지 가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와중에 상대 차량 운전자가 놀라우면서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나타났다. 
 

 
 
"괜찮으신가요?" 
"지금 괜찮아 보이나요? 아이가 다쳤다구요. 아이가 저기서 피를 흘리자나요!! 운전을 어떤식으로 한거에요??" 
"제가 경황이 없어서요. 감기약을 먹고 졸음 운전을 했나봅니다" 
 
이렇게 말하며 감기약을 꺼내서 보여주며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든 피하고자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정신이 없어서 그 사람 말에 더 이상 대꾸하기가 싫었다. 통증도 점차 심해져 더 이상 서있을 수가 없어서 아이와 와이프 근처로 이동해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와중에도 경찰에 연락해 사고 신고를 하였다. 얼마지나지 않아 119가 도착하였다. 상대 차량 운전자가 연락을 했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알고보니 뒤에서 오던 차량 운전자분이 신고를 해주시고 2차 사고가 나지 않게 교통 정리도 해주신 것이었다. 차량 운전자분 동승자분은 와이프와 아이 옆에서 안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계셨다. 
 
통증이 심해져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거 같다고 생각될 때 경찰이 도착했다. 경찰은 먼저 나에게 상태가 어떻냐고 물어보고 이후 신상, 사고 발생 경위 등을 물어보았다. 정신이 여전히 있었기에 또박또박 말하였다. 모든게 사고 내용이 되기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내용을 전달하였다. 이후 음주 측정을 하였고, 상대방 운전자에게도 사고 경위 등을 물어보고 음주 측정을 하였다. 다시 나에게 돌아온 경찰은 사건 번호를 알려준 후, 사고 차량을 촬영 후 구급 대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구급 대원이 어디가 아픈지 물어보길래, 오른쪽 팔과 가슴쪽에서 통증이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보다 아이와 와이프를 먼저 이송해 달라고 부탁했다. 구급 대원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상대방 차량에 탑승한 인원 중 한명도 다쳤다고 해서 이송 우선 순위를 두고 고민을 하는듯 싶었다. 몇 분 후, 구급 대원이 와서 이송 순서를 설명해주었다. 현장에 출동한 구급차가 2대밖에 안되어서 와이프와 아이, 그리고 상대방 차량의 부상자를 각각 먼저 이송하기로 결정하였다고. 추가 구급차가 5-10분 이내에 도착하니 나는 해당 구급차를 타고 이동해야할거 같다고 알려주셨다. 일단 아이와 와이프가 중요하니, 내가 어떻게 되든, 그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거기에다가 장인 어른이 계시는 오산 한국병원으로 이송을 부탁드렸다. 아무래도 장인 장모님이 가까이 계시는 곳이 향후 치료를 고려한다면 나을거 같다는 판단이었다. 와이프와 아이한테 괜찮을거야, 아무렇지도 않을거야라고 말하고 떠나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제발 크게 다치지 않았기를 간절히 빌었다.
 
와이프와 아이가 떠난 뒤에야 전기 충격을 받는 듯한 상상도 못할 통증이 전신에 흘렀다. 그제서야 교통 사고의 피해자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구급차가 빨리 왔으면 하는 간절함만이 머리 속에 가득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드디어 구급차가 왔다. 탑승하기 전에 아까 교통 정리를 해주신 차량 운전자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드렸다. 괜찮아지면 꼭 연락드리겠다고, 절대로 은혜 잊지 않겠다고. 그리고 구급차에 탑승했다. 이제야 병원에 가는구나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송 중에 구급 대원이 여러 병원에 연락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고보니 의사 파업이라 병원 수용이 어렵다고 하는데, 그 상황을 내가 마주하게 되니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때마침 장인 어른에게 사고 소식을 들었는지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다. 전화를 받을 수가 없어 구급 대원에게 대신 전화를 받아 설명을 해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구급 대원은 현재 나의 상태를 비롯해서 이송할 병원이 어디인지 등을 말하였다. 그리고 환자 상태로 보아 위중한 상태는 아니기에 아주대병원, 동탄 한림대병원, 분당 서울대병원 등 대형 병원으로의 이송은 어렵다고 언급하였다. 아마 아버지가 대학 병원으로 이송을 강력하게 요청하셨나보다. 안성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 병원이 동탄 한림대병원인데 거기까지도 편도 1시간 내외 소요되기에 구급차가 가기에는 내가 생각해도 불가능한 이동 거리였다. 구급 대원이 여러 곳에 전화를 한 끝에 안성 성모병원 응급실에서 수용이 가능하다고 하여 그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3-40분 정도 지나 병원에 도착하였다. 병원 직원에게 인계된 나는 응급실로 이동되었고, 응급실 당직 의사와 간호사에게 상태를 체크 받았다. 외부 출혈 여부를 먼저 확인하고, 어디가 가장 아픈지, 어떻게 아픈지, 통증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하나씩 물어보았다. 그리고 엑스레이와 CT 촬영이 순서대로 이루어졌다. 응급실에 온지 1시간쯤 지났을까, 당직 의사 선생님께서 오시더니 나의 상태를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다. 오른쪽 손목은 골절이 되어 수술이 필요하고, 갈비뼈 4개가 부러졌고, 폐에 출혈로 보이는 흔적이 보인다고 알려주시며 즉각 입원을 해야한다고 말씀을 주셨다. 오늘은 수술이 어려워 내일 중으로 손목 수술이 진행될 예정이라고 추가로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오른팔에 깁스를 하게 되었다. 
 

 
 
6인실은 빈 곳이 없어 2인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입원을 하게 되니 갑자기 슬픔과 분노가 몰려왔다. 내가 다친 것도 있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평범했던 즐거웠던 일요일 오후가 교통 사고로 망가져버려서였다. 그쪽 길로 가지 않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일찍 출발했으면, 아니 풍사니랑을 아예 처음부터 가지 않았더라면 이렇지는 않았을텐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와이프와 아이는 괜찮을까, 어디 심하게 다치지 않았을까, 연락이 안되니 오만가지 불안감이 엄습하였다. 오른팔에 깁스를 하고 있으니 핸드폰을 사용하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불편했다. 정상적이었던 모든 것들이 불편해졌다. 나의 오른팔은 괜찮을까, 다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장애가 생기면 어떻게 하지 등 머리 속이 복잡했다. 
 

입원하고 1-2시간쯤 지나 부모님이 분당에서 오셨다. 엄마는 내 상태를 보더니 눈물을 흘렸고 아버지는 한숨을 크게 쉬셨다. 그리고선 장인 어른과 통화를 하셨다고 말씀주시면서 와이프와 아이는 괜찮다고 하셨다. 와이프는 타박상을, 아이는 눈썹이 찢어졌다고 알려주셨다. 크게 다치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다친게 가장 마음이 아팠다. 아버지는 의사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고 나의 상태에 대해 듣고서는 대학 병원으로 입원이 가능한지를 주변 지인들에게 전화를 하시며 문의를 하셨다. 그때 아주대병원에서 근무하는 아는 동생이 떠올라 동생 연락처를 아버지에게 알려주며 연락을 해보라고 알려드렸다. 

 

아는 동생과 연락을 하고 다시 입원실로 돌아온 아버지는 아주대병원으로 전원이 가능하다고 알려주셨다. 아는 동생이 정형외과에서 근무하는 지인에게 연락을 취해 수술 및 입원 가능 여부 등을 확인해주겠다고 하였다. 다만 의료 파업으로 인해 당장은 어렵고 화요일에 병실이 생긴다고 하여 그때까지만 이곳에 입원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을 주었다. 안성 성모병원도 나쁘지는 않지만 다른 병원에서 세컨 오피니언을 듣는 것도 이로울 것이라 판단하였다. 게다가 향후 통원 및 재활 치료까지 생각한다면 아주대병원이 더욱 다니기에도 가깝기에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아버지는 당직 간호사에게 대학병원으로의 전원 및 수술 취소를 말씀하셨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가는 것은 아니기에 이틀 정도 이곳에서 있으며 아주대병원으로 가는 날을 기다리기로 했다. 

 

부모님은 가해자의 연락처를 받고, 나에게 걱정말고 편히 자라고 안심시켜준 뒤에 집으로 돌아가셨다. 진통제를 먹어서인가 사고후에 계속 지속된 통증은 어느 정도 가라 앉은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렇게 2024년 11월 10일, 악몽이었던 하루가 끝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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