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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0일. 

 

4월 초에 오키나와로 가족 여행을 다녀 온 뒤, 두 달만에 다시 일본에 왔다. 나고야에서 녹황색사회 콘서트와 도쿄에서 세카이노 오와리 콘서트를 가기 위해.

 

한국에서 느즈막히 출발하려 했지만, 어중간히 가는 것보단 차라리 일찍 도착하는게 좋을거 같아 오전 8시 아시아나 항공을 타게 되었다. 콘서트 이외에는 다른 일정은 거의 없어서 기내 반입 캐리어 1개와 백팩 1개가 전부. 아마 지금까지 모든 여행을 통틀어 (출장 제외) 가장 가볍게 가는 여행이지 않을까 싶다. 출국 당일, 새벽 3시 20분에 일어나 전날 밤에 챙긴 짐을 다시 살피고 집을 나섰다. 머리와 몸은 비몽사몽하지만 마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녹황색사회와 세카이노 오와리를 보게 된다고 생각하니. 

 

 

 

아침 해가 어름풋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에 공항에 도착했다. 위탁 수화물도 없고 모바일 체크인도 완료했으니 바로 출국장으로 향했다. 보안 검색과 출국 심사도 수월하게 끝나고 면세 구역으로 들어왔다. 와이프가 요청한 것만 빠르게 확인하고 샌드위치를 먹고 출국 게이트 앞으로 왔다. 출국까지는 1시간 30분 정도 남았다. 항상 공항에 오면 그래왔듯이 녹황색사회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니 금새 탑승 시간이 되었다. 

 

 

 

오버헤드 빈에 짐을 넣고 자리에 앉은 후에야 탑승할 때부터 느껴졌던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있어야 할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이 없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왜 없는지 궁금해지긴했다. 나고야까지 비행시간은 약 2시간으로 도쿄와 오사카와는 큰 차이가 없는데 여기에만 없나라는 의문도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전체적으로 제주 노선에 투입되는 기종이 나고야 노선에 투입되었다는 생각이었다. 기내 엔터테인먼트가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었기에 중요하지 않았던 궁금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사라졌다.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고야에 제 시간에 도착하여 녹황색사회 콘서트에 가는 것이었기에 아무 탈 없이 출발하기를 빌었다.  

 

 

 

이륙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창밖으로 익숙한 곳에 눈에 들어와 반가워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결혼 전까지 살았던 분당 상공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구글 맵 등을 통해 항공 사진으로 많이 보긴 하였지만, 비행기를 타고 가며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저 멀리 야탑, 이매, 서현, 정자, 미금, 판교가 어딘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부모님이 살고 있는 동네가 어디인지, 회사 위치가 어디쪽인지 파악이 가능할 정도였으니 새삼 기분이 묘했다. 가능했더라면 분당 위를 날아가고 있어요라고 당장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이미 서비스 불가 상태이니 마음으로만 내 마음을 전했다. 

 

 

 

새벽부터 움직여 몸은 무척이나 피곤한데, 막상 잠은 오지 않았다. 콘서트를 보러 간다는 기대감과 흥분감 때문일지도. 그리고 도쿄로 이동하면서 볼 후지산에 대한 동경 때문일지도. 가만히 있기에는 무료해서 탑승하기 전부터 읽던 책을 꺼냈다. 'Bad Blood'라는 강렬한 타이틀에 혹해서 샀는데 이제서야 읽기 시작했으니, 부지런하지 못한 나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책 소개를 간단히 하자면, 제 2의 스티브 잡스 또는 페이스북 신화를 만들고 싶었던 테라노스 사건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홈즈의 가짜 성공 신화를 다룬 내용이다. 워낙 유명했던 사건이다보니 국내에서도 많은 미디어 등에서 다뤘기에 원서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작가의 필력이 워낙 뛰어나다보니 술술 읽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니 벌써 일본 상공이었다. 느낌상으로는 도야마현 또는 후쿠이현 위를 지나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 이세만이 보이기 시작한 걸 보니 나고야가 가까워지는게 느껴졌다. 착륙 안내 방송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는 주부 지역의 관문인 주부 센트레아 국제공항에 착륙하였다. 긴장되고 들뜬 마음을 가라 앉히고 입국 심사를 통과하고 세관을 지날때 직원이 나를 멈춰세웠다. 그리고는 무슨 일로 나고야에 왔는지 물어보았다. 통상적인 질문이라 생각하였기에 "콘서트를 보러왔다"고 답하니 누구 콘서트인지 다시 물어보길래 "료쿠오우쇼쿠샤카이(녹황색사회)"라고 대답하니 놀라는 표정으로 웃으면서 엄지척을 해주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분명 확신컨데 그분도 료쿠샤카 팬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토코나메선을 타고 어느새 메이테츠나고야역에 도착했다. JR 도카이 나고야역 바로 옆이라 길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쉽게 환승이 가능했다. 정 어려우면 밖으로 나가서 센트럴 타워를 찾아가면 거기가 바로 나고야역이다. 일일 이용객만 백만명이 넘는 주부지방 최대 교통의 중심지인 나고야역 구경은 일단 뒤로하고 숙소에 짐을 맡기러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었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피로가 더욱 쌓이는 듯 싶었다. 숙소는 나고야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밖에 안되었지만, 짧은 거리도 멀게만 느껴졌다. 숙소로 가는 도중 '츄오 신칸센' 나고야역 건설이라는 표지가 있어 발걸음을 멈췄다. JR 도카이가 회사의 사활을 걸고 만드는, 시나가와역과 신오사카역을 72분만에 주파하는, 츄오 신칸센의 나고야역 신설 공사를 알리는 내용인데 실제로 그 장소에 와보니 많은 기대가 되었다. 2031년 츄오 신칸센의 1구간이 개통되면 어떤 모습으로 이곳이 변할지 생각이 들었다.

 

 

더위를 뚫고 숙소에 도착, 잠시 땀을 식힌 뒤에 프론트에 여권을 내밀며 예약을 했다고 하였다. 예약 확인까지는 보통 5분도 걸리지 않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기에 살짝 불안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생각을 끝내기도 전에 호텔 스탭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며 예약 내역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말을 하길래, 나도 당황해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약 내역이 확인 안된다고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예약 어플의 내용을 확인하면 어떻겠냐고 말하길래 잠시 의자에 앉아 확인을 했다. 아고다 예약 페이지로 들어가니 예약 내역은 사라져 있고, 신용카드 문제로 인해 결제 자동 취소를 한다는 메시지만 남겨져 있었다. 아뿔싸...그러고보니 5월 중순에 신용카드 분실을 해서 새로 발급을 받았는데 아고다 예약을 완벽하게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신규 카드 갱신을 안했던 나의 온전한 실수다. 아아아악! 

 

혼미했던 정신을 차리고 프론트로 다시 가서 혹시 오늘 투숙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더니 직원이 웃으면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가격을 알려주었다. 나고야에서는 1박만 할 예정이라 가격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약 여기 호텔에 투숙이 불가능했다면 (물론 다른 호텔이 바로 옆에 있었지만), 호텔을 찾으러 분명 시간을 허비하고 체력도 소모하고 모든 일정이 뒤틀렸을 것이다. 예약과 동시에 비용을 지불하고 짐을 맡겼다. 그리고 노트북을 꺼내 도쿄의 숙소에도 연락을 해서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예약이 가능한지를 이메일로 물어보았다. 여기가 나고야라 다행이었지만, 도쿄는 어찌될지 모르니 미리 확인하는게 좋으니까. 이 모든 상황이 분명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나를 탓할 수 밖에 없었다. 

 

 

패닉을 뒤로하고 정신을 차리니 배가 고팠다. 맛집 리스트는 잔뜩 구글맵에 체크해두었는데 이동할 힘도 나지 않아 일단 나고야역으로 갔다. 역에서 파는 음식 중에도 의외로 맛이 있는 곳도 있을테니까. 나고야역 중앙 통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무엇을 먹을까 한참 고민을 했다. 딱히 메뉴를 정한 것은 아닌데 키시멘에 유독 눈이 갔다. 나고야의 지역 명물이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점심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줄을 서 있어서, 분명 맛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잠깐 대기줄에 서 있다가 직원의 안내로 들어가, 큰 고민 없이 에비 냉키시멘을 주문했다. 지쳐있는 상황에서 차가운 맛을 만끽하니 모든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맛도 기대 이상. 칼국수면이 가츠오 육수와 너무 잘 어울려서 한 그릇 더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가장 좋았던 것은 제대로된 한끼를 이제서야 먹었다는 거. 이게 행복이구나. 나고야에 있는 시간은 24시간도 되지 않겠지만, 떠나기 전에 키시멘을 한두번 더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다. 

 

 

키시멘으로 행복해졌으니, 이제 구경을 하러 가야지. 체크인 시간까지는 2시간 정도 남짓 남아서 어디를 갈지 고민했다. 오다 나가노부의 후계자를 정하기 위한 역사적인 회의가 열렸던 키요스 성, 영화 아가씨의 배경인 미에현 쿠와나시에 있는 롯카엔을 고민했다. 두 곳 모두 3~40분 거리에 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지만 왕복하는 시간, 가서 구경하는 시간 등을 종합적으로 따시면 촉박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과감히 포기했다. 다음에 오자고. 대신 나고야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미라이 타워를 갔다. 도쿄타워, 우메다 스카이빌딩처럼 화려하거나 아름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투박한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때 나고야 TV 타워라 불리며 전파탑 역할로 일본 경제 부흥의 아이콘이었지만, 지금은 관광지로서 새로운 기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새삼 다르게 느껴졌다. 전망대서 바라보는 나고야 시내 전경은 편안함으로 느껴졌다. 도쿄의 모습이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함이라는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분이었다. 가기 전까지는 노잼 도시에 가서 뭐하냐라는 말도 들었는데, 오히려 도쿄나 오사카 같이 답답하고 북적하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도시 전체가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망대서 내려와 타워 아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생맥주를 마셨다. 지금 5월말부터 6월까지는 일본은 비어 가르텐 시즌. 야외에서 생맥과 다과 등을 즐길 수 있는데, 마침 미라이 타워 아래에 있는 카페에서도 생맥을 팔고 있길래, 바로 들어가 생맥을 시켰다. 나고야에서 대낮에 생맥을 즐기다니 이런게 바로 여행의 묘미이지. 이제 남은건 녹황색사회 콘서트 밖에 없으니 이곳에서 맘껏 여유를 즐겼다.